8회부터 시작한 나의 사랑타령은 오늘까지 이어진다. 오늘의 글에선 사랑의 범주를 보다 확장시키려 한다. 눈 들어 돌아보면, 온통 사랑 천지다. 사랑을 갈구하고 필요로 한다. 물론 겉으로는 갈등과 분노, 다툼과 폭력이 전부인 것 같다. 때론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그게 전부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 힘은 대다수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대문호 톨스토이는 물었나 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하는 그 하나, 가장 고귀하지만 가장 흔하게 남용되고 무시되어서 이젠 사람들이 그것 없어도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그 하나를 영화들이 어떻게 비춰내고 있는지 만나보자.

 


9.< 좋지 아니한가 > 제작년도 2007 감독 정윤철 출연 천호진, 문희경, 김혜수, 유아인, 정유미, 박해일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2016

 

오랜만에 한국 영화를 소개한다. 출연진도 제목도 이야기도 참 재미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 예로부터 아름답고 따뜻한 가치로 추앙받아온 ‘가족’에 대해 아주 색다른, 그러나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접근을 보여준다. 일단 제목이 ‘좋지 아니한가家”인데, 심씨네 가족을 들여다 보면 전혀 ‘좋지 아니한 가족’이 맞다. 한 집안에 모여사는 다섯 사람이 서로에게 무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관심도 없고 정도 없어 보인다. 허리띠 졸라 맨 억척스런 엄마(문희경)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고개(?)를 숙여버린 아빠(천호진), 전생에 왕이었다고 믿는 아들 용태(유아인)와 미스터리한 딸 용선(황보라). 그리고 무협작가랍시고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모(김혜수)는 가족이란 명분을 대충 유지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한 집에 모여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그러던 어느 날, 심씨네 가족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아들, 딸, 애견 용구까지 다 위기다. 물론 그들은 나름 문제를 풀고 일상의 안정을 되찾지만, 그건 여느 가족영화들이 지향하는 감동적 화해나 용서, 뭐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기엔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무관심하다. 가족이라고 서로 간에 모든 것을 공유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희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비밀은 남겨둔 채 그저 덤덤하게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아니한가’라는 말이다. 이 영화가 전하는 가족 사랑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관람 포인트! 출연진 모두가 개성만점의 열연을 보여주지만, 엄마로 분한 문희경의 감정선과 행동을 잘 따라가면 ‘아하? 하하하!’ 소리내서 웃을 순간들이 포착될 것이다.

 

10.< 파리의 딜릴리Dilili in Paris > 제작년도 2018 제작국 프랑스,독일,벨기에 감독 미셰로 오슬로 출연 프루넬 샤를 암브롱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2233
 

때론,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만 보고도 그 영화를 덥석 받아안는 경우가 있다. 내가 연출로 활동하고 있는 ‘극단B2S’의 단원 중, 물리적 나이로는 최연장자인데 정신적으론 누구보다 젊고 푸르른 빛의 소유자가 있다. 정년 퇴직 후에 전기에 감전되듯 연극에 사로잡혀서, 쿵쾅대는 심장 부여잡기에 바쁜 은발의 신사다. 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이 영화, 정말 좋던데요? 꼭 보세요!” 한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렇게 곱게 빛나는 두 눈이 발견해낸 좋은 영화라면, 비록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해도 과감히 소개할 수 있다. 지난 5회의 마지막 소개 작품이었던 “페르세폴리스”에 이어 두 번째다.

1947년생 감독 미셸 오슬로는 애니메이션 영화 한 길만 걸어왔다. 많은 작품을 작업했는데, 예술의 도시 파리를 테마로 하기는 처음이다. 이 영화에 관한 글들을 살펴보니, 감독이 예술의 도시 파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의 파리 사랑이 절절히 담긴 것 같다. 한 사람의 예술 장인이 자신이 열렬히 사랑하는 한 도시를 위해 바치는 헌사가 아닌가 싶다.

이야기는 풍요로운 예술의 전성기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 평화롭기만 한 이 도시에서 연이어 어린 아이들이 사라진다. 이에 사랑스런 소녀 '딜릴리'와 배달부 소년 '오렐'은 파리 곳곳을 누비며 피카소, 로댕, 모네, 드뷔시, 르누아르, 퀴리부인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에게서 힌트를 얻는다. 꿈보다 더 환상적이고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 보랏빛 모험이 시작된다.

벨 에포크는 ‘좋은 시대’란 뜻인데,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의 신사 숙녀가 넘쳐 흐르던 시기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한 명, 건물에 붙어 있는 작은 장식 하나 하나에도 당시 유행했던 예술 트렌드인 아르누보 양식을 담아냈고, 물랑루즈와 개선문, 에펠탑과 로댕 박물관의 19세기 풍광이 가득하다니, 일단 볼거리가 대단한 영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1.< 다시 태어나도 우리Becoming Who I Was > 제작년도 2016 제작국 한국 감독 문창용, 전진 출연 조파드마 앙뚜, 우르갼 리크젠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6053

 

정말 특별한 다큐멘터리 한 편, 꼭 그대 가슴에 전해주고 싶다. 한국의 감독들이 장장 9년의 세월을 인도와 티베트를 오가며 촬영했다는데, 출연진은 티베트불교의 린포체와 그의 스승이 전부다. 그 긴 시간동안 카메라에 담긴 자연풍광도 어마어마하지만, 영화 속 두 사람이 주고받는 미소와 눈빛은 너무도 깊고 맑아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아, ‘린포체’란? 전생의 업을 이어가기 위해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 티베트 불가의 고승이며, 살아있는 부처라 불린다. 믿거나 말거나, 앙뚜는 전생을 기억한다. 6세 때 라다크 불교협회를 통해 린포체로 인정받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만큼 ‘린포체’는 티베트 불가에서 특별한 존재이지만, 앙뚜는 아홉 살 아이답게 호기심 많고 순수하고 겁도 많다. 앙뚜의 웃는 얼굴은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바라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앙뚜의 곁에는 항상 스승 ‘우르갼’이 서있다. 때론 부모가 되어 때론 친구가 되어 또 때론 린포체를 섬기는 자가 되어, 앙뚜의 유일한 동반자로 산다. 앙뚜를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희생한다. 아무리 종교적 관계라 하지만, 가족도 연인도 아닌 두 사람이 이토록 서로를 전적으로 품어주고 바라봐주고, 아니...서로에게 그토록 스며들 수 있다는 게 참 놀랍다. 그에 더하여,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의 압도적 풍광과 그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도 즐길 수 있다.

 


12.< 아고라Becoming Who I Was >  제작년도 2009 제작국 스페인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출연 레이첼 와이즈, 맥스 밍겔라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51733
 

이 영화, 한국에서는 2010년에 개봉했었다.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 상영 금지운동을 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가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적 종교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신의 이름으로’ 상대 종교인을 향해 폭력과 살인마저 저지르는 모습들이 나와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한다. 2019년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기독교계가 ‘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의 이름’을 앞세워서 시민의 광장을 집어삼키고는 야만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아고라”를 보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내 별칭을 ‘히파이타’로 사용할 정도로 그를 흠모했다. 히파이타는 4세기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다. 그 옛날에 한 여성이 대 학자로 최고 지식인으로 뮤세이온의 교사로서, 수많은 남자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특별하다. 정말 얼마나 탁월했으면...! 하긴, 기하학자이자 플라톤과 이르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르친 것도 모자라, 자신은 남자들의 사랑이 아닌 ‘진리’와 결혼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 속 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학생 중 하나가 히파티아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수업 중에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자 그녀는 생리대를 보여주며, "보라. 이것이 네가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사랑하지 않지."라고 응수한다.

아무튼, 히파이타는 기독교광신자들에 의해 악마의 주술을 사용하는 위험한 마녀로 둔갑하게 된다. 그들은 히파이타를 습격하여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살해하고 만다.

남자도 부모도 친구도 아닌, 진리를 사랑한 히파이타! 그의 마음은 공감되고 이해되는데 그의 탁월함엔 다가설 수 없는 부조화라니... 나 같은 범인에게 그것이 다 허락될 리 만무하다. 그저, 영화 “아고라”를 통해 히파이타라고 하는 위대한 사랑꾼(?)이 좀더 널리 알려지길 바랄 따름이다.

관람 포인트 하나, 알레한드로 감독이 편협하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종교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화면 곳곳에 배치된 상징들과 메시지들 찾아내며 보기

포인트 둘,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구경하기.

포인트 셋, 레이첼 와이지의 매력 관찰.

 


13.< 안토니아스 라인Becoming Who I Was > ★★★★★ 제작년도 1995 제작국 네덜란드 외 감독 마를린 호리스 출연 빌레케 반 아멜루이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449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고싶은 단 한 편의 영화를 고른다면?

이런 곤혹스런 질문에 0.3초만에 답할 수 있는 건, 내가 “안토니아스 라인”을 알기 때문이다. 은영이표 별 다섯개를 기억해주시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톨스토이 선생께서 선언했다면, 마를린 감독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네 실제 삶 속에서, 특히 상처 투성이의 쓰라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할지 보여준다. 대지의 강인하고 자비로운 여신으로서, 그림과 음악의 예술성을 가지고, 철학과 문학의 빛에 의해, 평등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자유롭되 따뜻함을 잃지 않는, 안토니아의 식탁공동체가 그 대안이 될 것이다. 가만...이게 다 무슨 말이냐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네덜란드의 어느 마을, 안토니아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열 여섯 살 된 딸인 다니엘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딸을 데리고 온 여자를 사람들을 의심과 경계, 경멸의 시선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세상 그 어떤 장수보다도 당당한 걸음이다. 나는 영화든 연극이든, 그렇게 멋지게 걷는 여성 캐릭터를 본 적이 없다. 태산을 뚫고갈 강인한 눈빛과 기상은 내가 닮고픈 이상향이 돼버렸다. 어머니의 농장을 물려받은 안토니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마을에서 소외받고 고통받은- 주로 가부장적 남자들에 의한 폭력과 성적 학대로 인해- 사람들을 감싸준다. 쓰러졌던 사람들이 안토니아의 농장에 모여 함께 먹고 일하며 그들의 삶을 재건해간다.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그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안토니아가 공동체원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형태의 만남을 선택하든 비판이나 정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원 모두가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여 일하고, 그 열매는 다 같이 누리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엔딩 역시, 임종 장면이다. 다만, 안토니아가 임종을 지켜보던 자리에서 이젠 자신이 임종을 맞이해야 하는 자리로 옮겨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장 4대에 걸친 후손들이 그녀를 둘러싼다. 딸 다니엘은 화가이자 남다른 사랑을 선택한다. 손녀 테레사는 철학과 수학에 능하고 음악 작곡도 한다. 역시, 남다른 사랑을 한다. 증손녀 사라는 이 모든 역사를 보고 느낀 대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관람 포인트 하나, 안토니아-다니엘-테레사-사라로 이어지는 4세대 각각의 여성들이 상징하는 여성적 힘과 원리를 찾아내기.

포인트 둘, 안토니아의 공동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 등을 스스로 선택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유지한다.

포인트 셋, 안토니아가 남자친구와 사귀는 방식 살펴보기.

포인트 넷, 네덜란드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라고?

 

이제, 영화 목록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오늘로써 열 번의 만남이 꽉 채워졌다. 이제까지 게시된 리스트들을 보다가, ‘내가 너무 모르는 영화들만 잔뜩 있네?’ 혹은 ‘왜 이렇게 오래된 영화들만 소개하지?’ 하는 짜증이 올라왔다면? ... 미안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내겐 그런 모양의 영화들을 유독 강하고 크게 받아들이는 나만의 감수성 장치가 있는 것 같으니까.

지난 2회차 글 중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이란 영화를 소개했었다. 어린 소년 아마드가 짝꿍 네마자드에게 숙제 공책을 전해주고자 무수한 노력과 과정을 밟은 끝에 찾아낸 비법을 강조했었다. 진정, 사랑은 허다한 말을 덮으며, 사랑은 그냥 행동하는 것이라고. 아마드가 짝꿍의 공책에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이러첨, 영화는 종종 내게 특별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삶 앞에서 행여 무감각해질 때나 나의 뇌가 굳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를 다시 흔들어깨운다. 그런 특별한 의미의 영화들을 여러분 앞에 내놓고 나니 참 고맙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