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많은 문제는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업데이트가 안 되는 사람들,

내가 기존에 배운 게 길이고 진리고 하나의 정답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평생학습이라는 말에는 사람이란 평생을 통해 배우고 평생 공부한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배우는 사람은 변화하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

나무가 그러하듯 사람도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나이 들었다고, 뭔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삶은 사실 ‘삶’이라 이름 붙이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죽기 전까지 사람은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 이유진, 웹진 [다들] 30호 중에서

 

구독하는 웹진의 과월호 페이지를 무심히 넘기다가 퍼뜩 한 단락의 문구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다들]에서 본 위의 내용이다. 서른번째 호의 주제는 ‘변화와 성장’이었다. 30이란 숫자는 새롭게 자세 및 마음가짐을 돌아보아야 하는 타이밍이 맞다.

배우지 않는 삶은 ‘삶’이라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배우지 않는 삶은 죽음과 다름 없다는 꽤 강한 주장이다. 여기서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이란 말이 그냥 읽히지가 않는다. 예전에 읽은 소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는 어른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 소년 오스카가 스스로 성장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지하로 추락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오스카는 정신은 조숙하지만 모습은 아이인 채로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자로서 시니컬하게 보여주었다. 성장을 억지로 멈춘 소년의 모습도 바라보기 편치 않았듯이 몸체는 커졌는데 어른으로서의 의식과 행동이 따르지 못한다면 당연히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변하지 않기 위해서 변화해야 한다.

재차 변하다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물어보게 된다. 변하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말에는 사랑은 지켜져야 하는 숭고한 가치이자 약속이니까 변하는 건 배신이다, 곧 나쁜 것이다란 힐난이 숨어 있다. 그럼 우리는 변해야 하나 변치 말아야 하나?

만물유전설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인간은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말대로 조금 전 발을 담근 물은 엄밀히 아까 그 물이 아니요. 발을 담근 그 사람도 직전의 그 사람과 엄밀히 다른 사람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계 속에서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해지지 않으려면, 도태되지 않고 고착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본질을 유지하려면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궤변 같지만 변하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한 변화 성장 Grow UP

성장하려면 변화해야 한다. 빠르기가 지구 최고 속도인 대한민국에서는 더 열심히 따라잡기 위해 배워야 한다. 게다가 요즘은 고정된 한 개의 답이 아니라 다원화된 답들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는 시대이니 만큼 리드미컬하게 이 사회와 춤추듯이 소통하며 살아가려면 평생 배우는 것이 디폴트값일 수밖에 없다. 50+세대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로서 어른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들, 자세들에 대해 생각하고 무엇이 어른다운 모습인가를 고민하고 실행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성장하다의 의미, 그로우 업Grow Up은 양적인 성장 외에 질적인 성장, 인간으로 말하면 철이 든다는 의미에 가까울 듯하다. 내 존재 자체가 주도적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것, 즉 오래도록 푸르게 살아 있는 나무처럼 행복한 변화이자 성장이다.

 

 

50+세대가 아까지 말아야 할 것

그럼 지속 성장하는 어른으로서 50+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가장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가장 빨리 잊기 쉬운 능력, 바로 경탄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였을 때는 무엇이든 놀랍고 신기하다. 뭐가 됐든 놀라울 게 없고 시들하다면 바로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다. 이왕이면 뭐든 강점에 주목해주며 그것에 경탄하고 독려의 메시지를 선물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 어떨까. 긍정심리학에서는 한 주체의 약점보다 강점에 더 주목할 것을 권한다. 보는 눈이 없어서 강점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다. 강점과 약점 중에서 기꺼이 강점을 봐주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괴팍해지는 것, 완고해지는 것은 유연성이 떨어져서이다. 자꾸 내 위주로 판단하다 보니 상대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 눈에 들어오고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쉽다. 어떻게 해야 나무처럼 품이 넓고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영화 <더 헬프The Help>의 흑인 유모 에이블린을 보면 깨닫는 지점이 있다.

 

“넌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3399]

 

영화 <더헬프>의 시대적 배경은 1963년 미국 미시시피주이다. 불과 반 세기 전이지만 당시 흑인 유모가 백인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위치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지닌 에이블린은 언제나 헌신으로 백인 아기들을 보살핀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는 스키터라는 여자 아기에게 “넌 똑똑하고 친절하고 소중해”라고 늘 속삭여준다. 스키터는 방치하는 백인 친모 대신 에이블린의 보살핌 속에서 자존감 있고 의식있는 여성작가로 성장한다. 마침내 스키터에 의해 흑인 유모들의 실생활이 책으로 발간되며 하나의 의미있는 전환점이 마련되고 주인공들은 한층 더 자유롭고 성장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에이블린은 나무 같은 품이 아주 큰 어른이다. 그녀가 하는 일의 가치가 그 시대적 한계로 인해 물질적인 보상이나 사회적인 대접으로 환산돼 돌아오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존재가치로 인해 스스로 빛난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흑인 여성의 삶이 조금 진전하게 됐다.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으면서도 가장 위대한 목소리를 아낌없이 전함으로써 세상을 나아지게 만든 한 여성, 나무같이 품이 큰 한 어른으로 기억된다. 50+세대가 후배 세대와 소통하면서 무엇을 아낌없이 주어야 할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