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국가를 그리며

 

들어가는 글
국영방송 KBS.1.TV.는 올해 정초 정도전 드라마를 방영했다. 살아남은 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특권 속에 삼봉 정도전(1342~1398)은 600년이 지난 이제야 진실을 밝혀달라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여 그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하여 보자

 

출생
고려 말 난세에 경북 봉화출신인 정도전은 충북 단양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나 도담삼봉(島潭三峰)에서 따서 호를 삼봉이라 지었다. 고려 말 개혁을 꿈꾸던 성리학자들이 대부분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지만 대조적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미한 지방 벼슬을 유지했다. 부친 정운경에 이르러서 경제학이란 관리로 중앙에 진출한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호족들로 부터 무시를 당하고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이 되었다. 더욱이 승려와 노비사이에 난 외할머니의 출신성분으로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다. 이 외톨이 생활이 그로 하여금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장
 삼봉은 3년 선배이자 동지인 온건보수파 정몽주와 함께 이색문하생으로 들어가 20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30대에 종4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비판적 성격으로 권문세족들에 의해 젊은 시절을 10년간 유배와 방랑으로 흘러 보냈다. 
그는 41세에 48세의 군사실력자 이성계를 만나 조선의 장자방이 되어 역성혁명(逆成革命)으로 구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을 건국했다.

 

절반만 이룬  꿈
삼봉이 세우고저 했던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민본주의(民本主義)로 민생의 안정과 풍요를 정치의 최고 가치로 꼽았다. 그래서 천하 만민 누구나 호구 수에 의해 땅을 가져야 한다며 계민수전 (計民受田)방식의 균전제(均田制) 토지개혁을 실시하려했다. 또 권력의 기원은 백성과 통치자의 계약으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한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꿈꾸었다.

삼봉은 탁월한 군사전문가로 당시의 동북아 국제질서를 보고 사병을 정규군화 하여 권력공백 상태인 요동정벌론을 주장하였다.  14C 요동은 원나라가 패망하여 몽고로 밀려나고 명나라는 주원장이 죽고 손자 혜제와 혜제의 삼촌사이에 왕위다툼으로 국가를 안정하기 급급했다. 여진족도 미처 장악하지 못해 10여 년 동안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남아있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죽음
1398년 태조가  8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5남 이방원은 1차 왕자의난을 일으켰다. 이날 이성계를 문병하러가던 정도전은 어린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친위쿠데타를 음모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이방원은 그를 권세욕에 눈먼 모반자로 낙인찍어 56세에 참수됐다. 조선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그의 목은 만인이 볼 수 있게 광화문에 효수(梟首)되었다 한다. 이 정도전변란설은 500년이 지나 경복궁을 재건하는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됐다.

 

 역사의 평가
그 후 이방원은 2차 왕자의난을 일으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내쫓고, 왕위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무엇보다도 아들 세종이 태평성대의 오백년 왕조의 초석을 놓아 태종의 성공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조선개국을 이끌었던 정도전은 도덕과 정치의 일치로 백성을 위한 부강한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쳤다. 그러나 조선은 그를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만들고, 처세에 능한 모사꾼으로 전락시켜 600년 내내 만고역적으로 몰아 싸늘하게 내쫓고 되돌아보지 않았다. 이는 태종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조의 의도적 매도 때문이다. 

 

삼봉의 집 수진방(壽盡坊)터
 현재 수송동 종로구청 정문 옆에는 ‘정도전집터’라는 재목아래 ‘조선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살던 집터로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는 수송국민학교가 세워 졌었다’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또 이곳에서 공평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삼봉길이라 불린다.

묘소의 흔적을 찾아서
그러나 삼봉의 묏자리는 조선왕조 내내 천대받아 어디인지 확실치 않다. 봉화 정씨족보에는 삼봉의 묘가 광주 사리원에 있고, 부인 최 씨 묘는 현재 양재역 근처 상초리에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에는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1989년 한양대 박물관은 우면산 주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세 지맥 중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자리로 보이는 끝자락 지맥에서 이름 없는 묘소를 발견했다. 비석도 없고 폐허가 된 그곳을 발굴하니 몸통은 없고 머리 부분 만 있는 유골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부장된 자기 등의 연대를 추정해보니 동일시대로 추축되고 유골은 현재 한양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후 이 묘 자리는 양재고등학교 공사에 쓸려 들어가 이제는 흔적이 없어졌다.

 

쌈지마당 빗돌
 1800년대 초 강원도 건봉사 주지를 지냈던 만화(萬化) 스님(세속명 봉화 정씨 응술)의 문집에도 ‘삼봉공의 산소가 과천 상초리 사리현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서초구는 이들 고문에 나온 위치가 현재 ‘서초동 산23-1번지’(쌈지마당)로 규정했다. 2013년 12월 17일 정도전의 민본사상을 기리기 위해 구청 옆에 기념비(빗돌)를 세우고 제막식을 했다. 빗돌에는 ‘삼봉 정도전의 산소터’라는 제목 아래  ‘정도전의 산소가 이곳 서초에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여기에 삼봉의 민본사상을 기리는 빗돌을 세운다.’라고 돼 있다.

정도전연구가 조유식기자에 의하면 목 없는 유해는 현재 평택시 진위면의 정도전 사당인 문헌사(文憲祠) 맞은편 은정골 야산에 가매장되어있다고 한다. 이제는 이 목의 주인이 확인 하여 600년간 소리 없이 떠돌던 풍운아 삼봉의 영원한 안식을 찾아 주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취재/사진 서재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