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김고은, 정해인 주연의 ‘유열의 음악 앨범(2019)’은 청춘 남녀가 우연과 필연을 반복하는 레트로 감성의 멜로 영화다. 이 영화의 촬영장소 중 하나로 ‘낙원시장’이 나온다. 

 

종로3가 ‘낙원악기상가’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 서울 변두리에나 있음 직한 주변 분위기와는 완연히 다른 재래시장이 펼쳐진다. 침침한 조명 아래 음식점, 정육점, 철물점, 생선가게, 야채가게 등 200여 점포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아는 사람만 안다는 ‘낙원시장’이다. 천장에는 백열전구가 주렁주렁 걸려있고, 아무렇게나 팔 물건들이 배열된 좁고 복잡한 통로와 그곳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전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이 건물이 속한 ‘낙원동’은 본격적인 재개발을 앞두고 입주권을 사려는 사람과 기존의 집을 철거하려는 사람들 속에서, 무허가 작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난장이 일가의 좌절을 산업화 사회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포착한 소설 속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1975)

 

악기상가, 재래시장, 아파트로 구성된 ‘낙원상가아파트’는 주상복합의 효시로 불리는 세운상가 이후 두 번째로 지어진 작은 도시 스케일의 건물이다. 도로 위에서 수평적으로 확대되고 수직적으로 확장된 ‘ㅅ’자 형태의 이 공간 집적체는 1층이 필로티 구조로 약 1만 평의 건물을 떠받친 기둥만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동쪽으로 익선동, 돈의동, 낙원동, 서쪽으로 인사동, 남쪽으로 삼일대로, 북쪽으로는 안국동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거리를 건물 아래에 두고 있다.

 

언뜻 봐서는 전체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건물로 그 밑으로는 주차장과 차로와 보행로가 어지럽게 교차하여 도로점용료를 내며, 한때 연예인이 살던 최고급 아파트였던 낙원상가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인 익선동, 화랑과 갤러리가 운집한 인사동, 실버세대들이 어슬렁거리는 탑골공원에 포위되어 일상과 추억이 뒤범벅된 이질적인 공간으로 머물고 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는 상업 시설, 지상 6층부터 15층까지는 149세대의 아파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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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상가 전경, 지하 낙원시장, 낙원아파트

 

『일제 강점기 말기, 서울 시내 안에서 7개 구역이 공습으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고자 소개(疏開)되었는데, 경운동에서 청계천까지를 잇는 길이 600m, 폭 50m의 구역도 그중 하나였다. 해방 이후 이 소개지(疏開地)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하였다. 1967년, 낙원동 일대에 들어선 무허가 주택과 낙원시장을 정리하고 현대식 상가 건물을 짓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낙원상가는 1967년 10월 26일 착공되어 1968년 9월 15일 사용승인을 받고 1970년 12월 12일 완공되었다. 지하 1층에는 약 3,306㎡의 면적에 종래의 재래시장이 들어섰고, 지상 2층부터 5층까지는 약 29,752㎡의 면적에 다양한 상가가 입주하였으며, 6층부터 15층까지는 당시로서는 최고급의 아파트로 설계되어 약 15,868㎡의 면적을 149세대가 분양받았다. (손정목, 서울도시계획이야기1,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2003.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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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상가 ⓒ 서울시

 

서울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공간이라는 낙원상가를 한 번 더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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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동에서 바라본 상가와 아파트

 

1층은 대부분 도로와 주차장이고, 서쪽 공간에는 ‘서울생활문화센터 낙원’이 자리 잡고 있다. 생활 음악 위주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지역과 연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데 낙원역사갤러리, 악기보관소, 회의실과 강의실 그리고 연습실과 스튜디오 등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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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생활문화센터

 

2, 3층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악기 상가’로 2층은 종합상가, 3층은 전문상가다. 이곳에서는 기타, 색소폰, 피아노 같은 현악기, 관악기, 건반악기, 타악기는 물론, 마이크와 앰프 등 음향기기와 각종 부품이 거래되고 있다. 약 3백여 매장에서 총 3만여 종의 악기와 관련 물품을 거래하고 있다. 이만한 규모의 악기 전문상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크고 복잡한 건물인 만큼 악기 상가 출입구 외의 다른 입구를 찾기도 쉽지 않은데, 중2층이라는 2층과 1층의 사이 공간에는 ‘실낙원(失樂園)’이라는 라이브 공연 재즈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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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낙원

 

4층은 원래 허리우드 극장이었으나 시대변화에 따라 어르신들을 위한 2천 원짜리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으로 바뀌었다. 입구 앞마당에는 꽤 넓은 옥상도 있어서 쉼터로, 야외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관은 서울시의 유일한 노년층 전용 극장으로 꾸준한 관리와 보존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50플러스 세대가 청소년이었을 때 단체관람 영화관이었던 허리우드 극장은 1969년 개관 후 1990년대까지 개봉관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2005년에 폐관 후 지금의 실버영화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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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상가 안내판, 영화관 입구

 

5층에는 기업, 단체 등이 운영하는 사무공간이 있고, 5층 옥상은 6층부터 시작되는 아파트의 마당 역할을 하는 넓은 공간이다. 아파트는 낙원상가 옥상 위에 남향으로 엇비스듬히 앉아있는 모양새다. 여기서는 남산 N타워를 비롯해 탁 트인 서울의 경관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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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 옥상에서 바라본 남산

 

모두 10개 층인 아파트는 9층부터 15층까지 가운데 중정(中庭) 형태의 빈 공간을 두어 여느 아파트와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대별 입구 문밖으로 나 있는 편복도가 중정을 둘러싼 형태로 햇볕을 한껏 받아들이게 하고, 비와 바람을 막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아파트 옥상에 투명한 창이 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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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안 중정, 아파트 내부 모습

 

낙원상가 주변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조선 시대부터 주막과 기방으로 번성했던 낙원동 일대는 밤 유흥문화의 일번지였다. 해방 후 사교클럽과 살롱 등으로, 이후에는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으로 진화하며 오랫동안 대중음악과 유흥업을 주도해 왔다.

 

고려시대부터 사찰이 있던 자리였던 낙원상가 앞 ‘파고다공원’(파고다공원, 탑골공원, 탑동공원으로 혼용되어 불렸던 명칭은 1991년 ‘탑골공원’으로 통일되었다)은 1890년대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으며 대한제국 최초 서양음악단인 ‘황실군악대’가 주둔했다. 황실군악대는 해방 후 ‘경성악단’으로 바뀌어 시민을 위한 정기연주회 등을 열었고, 악단의 악사들은 이 일대에서 악기를 팔거나 음악 교습을 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1919년 3.1운동의 점화지로, 4~5천 명의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공원 담장을 따라 ‘파고다 아케이드’라는 악기 상가가 들어섰다. ‘파고다 아케이드’는 ‘반도조선 아케이드’, ‘신신 백화점’과 함께 서울의 3대 아케이드형 상가로 한동안 각광 받았으나 공원 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악기상들이 인근 낙원상가로 대거 이전하면서 낙원상가에 악기 점포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더불어 상가 2층은 음악인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모이는 ‘악사 인력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성기를 누리던 낙원상가는 90년대 들어 ‘노래방’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래방이 성업하면서 밴드와 악사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탑골공원 담장을 말발굽 모양으로 감싸던 파고다 아케이드가 철거된 후 제 모습을 찾아가던 공원은 음주, 방뇨, 쓰레기 투기 등 갈수록 이용 질서가 문란해져 갔다. 이에 서울시는 공원을 재정비하여 원래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3.1운동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길 수 있도록 2000년부터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2017년에는 낙원상가 옆에 ‘어르신들의 홍대거리’를 표방해 60~70년대 당시의 모습을 콘셉트로 ‘락희거리’를 조성하였고 이 일대 240m를 ‘송해길’로 지정했다. 한편, 2008년부터 탑골공원 담장에 기대어 수많은 타로 노점이 들어섰고 2018년이 되어서야 ‘타로 노점 정비’를 완료하고 본래의 담장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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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고다 아케이드, 송해길

 

해가 지는 오후부터는 지하철 3개 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 주변은 차도와 보도의 구분 없이 ‘포장마차 거리’로 변신하여 모여든 남녀노소로 시끌벅적 북새통을 이룬다.

 

건축가 황두진은 낙원상가를 이론적 배경은 물론 주변 지역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시대가 낳은 우발적 실험’이라고 평가했다. 50플러스 세대에게는 급속히 변화하는 도시환경에 적응하기는커녕, 변화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데 무의식에 잠겨있던 과거의 낙원동 흔적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 많던 떡집들은 어디로 갔을까? 장충동 족발집이나 신당동 떡볶이집처럼 ‘낙원떡집’이라는 상호를 달고 영업하던 떡집들은 2000년대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단 두 곳만 남아 옛 영화(榮華)를 반추할 뿐이다.

 

전통과 문화의 대표 거리인 인사동, 골목과 한옥이 어우러져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인 익선동을 지척에 두고 최첨단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지만 한쪽으로는 포장마차, 국밥집, 아구찜집들이 막걸리 한잔으로 허기를 달래 줄 것처럼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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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 뒤로 보이는 낙원아파트

 

낙원상가는 미래의 신중현이나 지미 헨드릭스를 꿈꾸며 처음 악기를 구입한 설렘의 장소로, 할리우드 키드가 되고 싶었던 유년기 추억의 영화관으로, 고릿하고 쿰쿰한 냄새와 김이 나는 지하 시장의 음식점으로, 세대 경쟁에서 밀려나 늙은 사자처럼 탑골공원 주변에 서성이는 노년층의 집결지로, 무료 급식을 기다리는 서글픈 군상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곳으로 현재를 관통하고 있다. 세계 8대 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첨단과 과거가 기묘하게 대비되면서 주거 공간과 상업 공간이 혼재하는 낙원상가,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 외벽에 세월의 두께가 찌꺼기처럼 덕지덕지 들러붙은 낙원아파트, 그리고 낙원동에서 숨 가빴던 근대사의 파편을 읽는다.

 

희망과 절망, 아련한 과거와 우중충한 잿빛 현재, 활기차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 이 모든 것이 함축된 매력적이고 독특한 시공간이 ‘낙원’이다.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powerarc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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