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부장은 지난달 건강검진에서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야근도 예전만큼 잦지 않고, 업무는 눈감고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침에 눈뜨는 것이 점점 무거워진다. 월요일 회의 안건을 미리 알 수 있고, 그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지도 예측이 된다. 문제는 이 예측이 틀린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치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그를 깨우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번아웃이 아니다. 과부하로 소진된 것이 아니라, 자극이 사라져 정지된 상태보아웃(Bore-out)이다. 보아웃(Bore-out)은 스위스의 경영 컨설턴트 필리페 로틀린(Philippe Rothlin)과 페터 베르더(Peter Werder)2007년 저서 보어아웃(Diagnose Boreout)을 통해 처음 이름붙인 개념으로, 과도한 업무로 에너지가 소진되는 번아웃(Burn-out)과 달리, 단조롭고 지루한 업무가 지속되면서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지는 현상을 뜻한다.


40대는 구조적으로 이 위험지대에 가장 오래 머무는 세대. 신입 시절의 긴장은 사라졌고, 은퇴는 아직 멀었으며, 업무 숙련도는 정점에 가깝다. 성장곡선이 완만해지다 못해 평평해지는 시기, 바로 그 지점에서 보아웃이 시작된다.




번아웃과 보아웃, 증상은 반대인데 결과는 같다

 

두 증상을 구분하지 못하면 처방도 어긋난다. 번아웃은 과잉 자극과 과잉 몰입에서 온다. 열심히 하다가 소진되므로, 회복의 방향은 휴식과 경계 설정이다. 반면 보아웃은 과소 자극과 심리적 이탈에서 온다. 할 일은 있지만 의미도 도전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휴식을 아무리 취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주말 내내 쉬었는데 월요일이 더 무겁다면, 부족한 것은 휴식이 아니라 자극이라는 신호다. 지루함을 휴식으로 치료하려는 것은 갈증을 담요로 덮으려는 것과 같다.


보아웃이 번아웃보다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번아웃은 티가 난다. 야근 기록이 남고, 얼굴에 피로가 드러나고, 주변이 알아본다. 그러나 보아웃은 조용하다. 출근하고, 일을 처리하고, 웃으며 퇴근한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기에 본인조차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나" 하며 증상을 부정한다. 이 부정 속에서 몇 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나는 지난 5년간 무엇이 달라졌나"라는 질문 앞에서 무너진다. 보아웃은 소진이 아니라 침식이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깎여나간다.






셀프 체크혹시 나도 보아웃?

 

● 지난 3개월간 업무에서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 된" 순간이 있었는가?

● 퇴근길, 오늘 하루가 어제와 어떻게 달랐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면 배우고 있던 것을 잃는다는 아쉬움이 드는가?

 

세 질문 모두에 "아니오"라면, 몸이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멈춰 있는 것이다.





뇌는 익숙함을 지루함으로, 지루함을 무기력으로 번역한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이 현상은 예상 가능한 결과다. 뇌의 도파민 시스템은 반복되는 자극에 대해 반응을 점차 줄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 습관화(Habituation)라 부른다. 같은 업무를 같은 방식으로 3, 5년 반복하면 뇌는 그 업무에 대한 반응을 최소화한다. 문제는 이 저전력 모드가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꺼진 뇌는 퇴근 후에도 켜지지 않는다. 주말의 취미가 시들해지고, 가족과의 대화가 건조해지고,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감각은 전염된다.

 

반대로 새로운 자극, 특히 예측 불가능하고 낯선 자극은 뇌의 신경가소성을 다시 깨운다. 여기서 희망적인 사실은 자극의 크기가 아니라 낯섦의 정도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보아웃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처방은 이직, 유학, 세계여행 같은 대형 전환이다. 그러나 대형 전환은 준비 기간이 길어 실행이 미뤄지고, 미뤄지는 동안 무기력은 깊어진다. 게다가 환경을 통째로 바꿔도 뇌의 습관화 패턴을 함께 바꾸지 않으면, 새 직장에서 3년 뒤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필요한 것은 큰 결단이 아니라 작고 잦은 낯섦, 이른바 '마이크로 조이(Micro-joy)' . 이는 일상 속 작고 사소한 긍정적 순간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음미함으로써 행복감을 극대화하는 심리 및 웰빙 전략인데 심리학과 뇌과학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마이크로 조이 발견법 일상을 깨우는 세 가지 환기 기법

 

마이크로 조이는 대단한 결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상 속 세 가지 작은 지점만 바꿔도 충분하다.

 

첫째, 퇴근 후 낯선 분야의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한다. 전공이나 업무와 무관한 영역일수록 효과가 크다. 재무 담당자가 도자기 공방에 가고, 개발자가 드로잉 클래스를 듣는 식이다. 여기서 핵심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초심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40대가 일상에서 가장 결핍된 경험이 바로 서투름이다. 조직에서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기에 서투를 기회 자체가 없다. 그런데 뇌를 가장 강하게 깨우는 것은 능숙함이 아니라 시행착오. 집 근처 문화센터의 2~3시간짜리 클래스면 진입 장벽도 낮다.

 

둘째, 평소 읽지 않던 장르의 책을 읽는다. 경영서만 읽던 사람이 SF를 읽고, 자기계발서만 읽던 사람이 시집을 읽는 것이다. 낯선 장르는 낯선 문장 구조와 사고 방식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뇌는 익숙한 독해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방법이 중요하다. 알고리즘 추천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이 아니라, 서점에서 평소 가지 않던 서가 앞에 서서 우연히 고르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할 것을 주고, 우연은 내가 몰랐던 것을 준다. 완독의 부담은 버려도 좋다. 보아웃의 반대말은 재미가 아니라 우연이다.

 

셋째, 출퇴근 경로를 바꾼다. 가장 작지만 가장 자주 반복할 수 있는 환기 기법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뇌는 그 길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자동조종 모드로 이동하는 동안 뇌는 사실상 꺼져 있다. 반대로 낯선 길에서는 뇌가 다시 주변을 관찰하고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다.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걸어보거나, 평소 지나치지 않던 골목으로 우회하는 것만으로도 출근길이 정보 처리의 현장이 된다.



 

낯섦을 붙잡아두는 장치 일주일에 한 줄

 

여기서 한 가지를 더해야 마이크로 조이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는다. 기록이다. 낯선 경험은 강렬하지만 휘발성이 높아서, 기록하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일상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방법은 단순하다. 매주 한 번, "이번 주 낯설었던 순간"을 한 줄로 적는 것이다. 도자기 클래스에서 손이 기억보다 느리다는 것을 알았다든가, 처음 걸은 골목에서 30년 된 세탁소를 발견했다든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이 한 줄 기록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첫째, 뇌는 기록된 경험을 더 오래 보존한다. 쓰는 행위 자체가 그 경험을 한 번 더 처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둘째, 더 중요한 효과는 역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적을 것이 있나"라는 질문을 품고 사는 사람은 낯선 것을 찾아다니기 시한다. 기록이 경험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의무가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석 달만 지속하면 열두 줄이 쌓이고, 그 열 두줄은 "나의 지난 석 달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었다"는 물증이 된다.




지루함은 고장이 아니라 신호다

 

많은 사람이 지루함을 부끄러워한다. 안정된 직장, 익숙한 업무, 무탈한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자신을 배부른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루함은 결함이 아니라 신호. 배고픔이 영양의 결핍을 알리듯, 지루함은 성장의 결핍을 알린다. 몸이 보내는 배고픔을 무시하면 몸이 상하듯, 뇌가 보내는 지루함을 몇 년씩 무시하면 삶의 감각 전체가 무뎌진다.

 

그러므로 보아웃 탈출의 첫걸음은 원데이 클래스 예약이 아니라, "나는 지금 지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하는 순간 지루함은 수치가 아니라 과제가 되고, 과제가 되는 순간 다룰 수 있는 것이 된다.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상은 성취의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그 성취 위에 계속 머무를 것인지, 그것을 발판으로 낯선 곳에 발을 디딜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박 부장의 아침이 다시 가벼워지는 데 필요한 것은 이직도, 안식년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 퇴근길,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처음 보는 골목을 걷는 것. 그리고 집에 도착해 그 골목에서 본 것 하나를 한 줄로 적는 것. 이 작은 시작이 보아웃을 탈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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