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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의 짧은 여름 속으로 기차는 달린다. 새벽 어스름을 뚫고 오슬로 중앙역을 출발해서 베르겐까지 달리는 노르웨이 국철이다. 496Km, 베르겐선은 북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악 지역을 통과하는 노선이다. 어두워지지 않던 지난밤을 아침 공기 속에 털어 내며, 빨간 고속철은 첫 도착지인 뮈르달로 향하고 있다.

 

나는 기차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 중에 물론, 다른 교통수단도 이용하지만 웬만하면 기차를 자주 이용하려 한다. 그것은 내가 기차역이 있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자동차보다는 기차가 더 친숙해서다. 기차는 길도 없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유일하게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발이 되어주었다. 오래전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왔고, 어쩌다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기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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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출발-뮈르달-플롬-구드방겐-보스-베르겐 도착이라는 여정을 잡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코스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설레는 구간이 될 것이라고 짐작한 도시들이다. 험준한 산악을 넘는 기차여행과 피오르드(fjord)의 절경을 볼 수 있는 페리호를 타고 거칠고 웅장한 원시의 자연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뮈르달(Myrdal)로 가는 방법은 선택의 여지없이 기차뿐이었다. 기차로만 닿을 수 있는 특별한 곳이라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기차는 제 몸을 휘어가며 굴곡진 철로와 수많은 터널을 지났다. 뮈르달까지 가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못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삼나무 숲 사이로 붉은색 2층 목조주택들이 점점이 이어지고, 푸른 하늘 눈부신 햇살이 넓은 초원 위에 쏟아지기도 했고, 느닷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달리는 동안 몇 개의 계절을 건너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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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목적지를 향해 갈수록 녹색의 숲과 검은 바위들과 농장들과 별장들은 사라지고 주변엔 온통 하얀 설경들이 펼쳐진다. 귀가 멍해지는 걸로 보아 고도가 높다. 기온도 점점 떨어져 창 밖 풍경은 난생처음 마주하는 8월의 겨울이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눈과 얼음, 사방을 둘러봐도 청정한 산천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마저 맑은 뮈르달은 내가 아는 어느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추전역이다. 해발 855m, 웬만한 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추전역을 하늘 아래 첫 역이라 부른다. 태백선은 복선이 아닌 단선이어서 이 노선을 운행하는 모든 열차는 추전역을 지난다. 뮈르달역도 오슬로와 베르겐까지 왕복하는 정기 노선의 중간역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점과 뮈르달에도 모든 기차가 지나간다는 점이 추전역과 비슷하다. 여행하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지구 반대편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차창+풍경1_800.jpg

 

 

 

문득 궁금해진다. 처음으로 기차가 높은 산을 넘을 때 노르웨이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깊은 협곡과 뾰족한 산봉우리……. 간빙기 빙하가 깎아 놓은 자연의 메시지를 빠르고 안전하게, 그리고 온전히 전하는 방법이 기차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뮈르달에는 오래전부터 기차들만 살기 시작했나보다. 과거의 시간이 미래의 시간에게 바통을 전해주듯 도시 뮈르달에는 기차가 쉼 없이 들고난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기차는 뮈르달 역에 도착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환승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플랫폼에 겨울 칼바람이 분다. 8월인데도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눈밭이다. 서둘러서 짐을 챙겨들고 입구 쪽으로 나간다. 객실 전광판에 이국의 언어로 된 안내문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뮈르달 해발 866,8 moh. 정차 중에 철로 횡단은 금지되어 있으며,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는 없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길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어디에도 길은 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그런 걱정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걷는다. 언덕을 오르니 그제야 조급한 마음 때문에 놓친 뮈르달의 진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타고 온 기차가 설원에 길게 누워있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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