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지킴이가 말하는 인생을 기쁘게 사는 법
예술의전당 ‘노회장’ 노인환씨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면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한 노신사가 있다. 올해로 83세가 된 전 음악평론가 노인환(盧仁煥)씨다. 예술의전당을 이용하는 클래식 팬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그는 자원봉사를 시작한 1998년부터 18년째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흐의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고 3개 국어를 유창하게구 사하면서 예술의전당의 품격을 높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인 그가 자원봉사를 하게 된 사연, 그리고 기부를 바라보는 시선.

 

 

“1998년에 예술의전당에 자원봉사제도가 만들어졌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 저명인사를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았어요. 처음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왔었는데, 몇 년 지나니까 차차 활동이 뜸해졌죠. 그러다 보니 지금은 그때 사람들 중 저만 남았습니다.”

 

 

운명처럼 하게 된 예술의전당 자원봉사

 

음악인이 꿈이었으나 6·25전쟁으로 꿈을 접고 사업을 하면서 살았던 그는 예순을 넘어 운명의 고약한 장난처럼 갑작스러운 어려움들을 겪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평소에 갖고 있던 기부와 봉사에 대한 단단한 철학과, 음악에 더욱 가까이 가고픈 마음으로 예술의전당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1998년 당시 그는 수출 사업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데다 담낭암을 앓은 아내와 사별해야 했다.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던 시절,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던 그에게 예술의전당 자원봉사 일은 복잡한상황에 처해 있던 자신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음악을 향한 그의 오랜 애정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원래 제가 음악 마니아였어요. 예술의전당이 생기기 전에는 일주일에 4~5일을 세종문화회관에 다녔어요. 예술의전당이 생긴 이후에는 예술의전당에 다녔는데, 자원봉사제도가 생기면서 나를 모시겠다고 음악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좋구나 싶어서 하기로 했죠.”

 

 

만나기 힘든 인연들을 만나는 즐거움

 

노씨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5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원봉사에 대해 “10년은 채우고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벌써 10여 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자원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그의 보람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봉사하고 집에 가면 엔도르핀이 솟아요. 어떤 사람들은 ‘반대급부를 받습니까’ 하고 묻기도 해요. 자기도 은퇴하면 저와 같은 자원봉사를 좀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래서 제가 반대급부를 받으면 자원봉사가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차비, 식사비 다 개인 경비로 처리하고 있거든요.”

 

팔순을 넘긴 나이, 물론 피곤할 때가 있다. 다리가 아플 때도 있고, 특히 겨울에는 힘겨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세요. 여기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아들은 단국대 교수가 됐어요. 그의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걸 봤죠. 그의 며느리도 알게 됐고. 다 여기서 만나서 찾아오고,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전당에서 봉사하는 저에 대한 보상이라고 봐요.”

 

 

음악을 유독 좋아하는 가족 내력


“둘째 딸이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 실력이 우수했지요. 그러나 사정상 지원해주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친구가 소규모지만 입학하면 전액 장학금을 주는 음악원을 소개해줬어요. 제 생각에 학비가 비싼 한국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연주를 녹음해서 보냈는데 오디션을 보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서 오디션을 봤는데 80명 중에서 합격했죠. 이후 30여년을 미국에서 지냈어요.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학교에서 교수로 있었습니다.”

 

노씨 본인도 그렇거니와 딸까지 음악과 깊은 연을 맺은 건 집안 내력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형이 네 명, 누나가 두 명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북한 흥남의 서호리라는 데가 고향이에요.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48년에 북한이 싫어서 38선을 넘어 서울에 왔습니다. 형은 이미 와 있었고. 누나는 1년 후에 왔죠. 그런데 이제는 혼자 남았어요. 형님이 세브란스병원 의사였는데 독주회를 할 정도의 아마추어 연주가였죠. 집안에 그런 기질이 있었어요.”

 

고교 시절부터음악을 좋아했다는 노인환씨.

 

“젊었을 때는 베토벤을 즐겨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로크 음악에 심취됐습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성과 일치하는 음악이 바로크 음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올해부터 ‘노인환 장학금’ 지급


노씨는 예술의전당 봉사를 하기 전부터 탈북난민을 위한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 공으로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을 받았다. 상금은 100만 원 정도였는데 20만 원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기부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부자가 아니다. 살고 있는 곳은 20평짜리 아파트. 그러나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에서 건물을 지을 때 모금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건 장학기금이 만들어졌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젊은이를 키워서 그들이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금년 가을에 2학기 장학금 300만 원이 내 후배인 사회과학대 경제학과 학생에게 지급됩니다. 그쪽이 금전적인 기부라면 예술의전당에서 일하는 건 노력을 기부하는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는 나이가 들면서 기부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세금 제도도 그렇고, 돈을 아낀다고 끝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거 아녜요. 또 자식을 스스로 일으켜줄 수 있게 교육시키고 돌봐주는 건 좋으나 많은 물질이나 재산을 물려주는 건 자식을 망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자식에게 가르칩니다. 그것만 가르치면 자식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이 곧 내가 잘 살 수 있는 최고의 방법

 

그는 사상과 이념의 문제도 기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하며 싸웁니다. 그런데 있는 사람이 베풀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납니다. 자본주의는 기부하고 남을 도와줌으로써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꾸 자신에 대한 수정을 해줘야 해요. 미국 같은 나라는 기부를 얼마나 많이 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자신들이 최선이라고만 믿으면서 제도에 수정을 안 했어요. 그러니까 망한 거예요.”

 

노씨는 우리나라 시니어들 중에서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시니어들 중 있는 사람은 베풀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그 베풂은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닌, 바로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푸는 것이 제가 사는 것이라고 믿어요. 거기서부터 기쁨이 나오고, 기뻐하니 건강해집니다. 예를 들어 은행 중역들은 은퇴한 후에는 으레 국내 골프장을 다 다니고, 다른 나라의 골프장도 다녀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허허하고 완전히 차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그렇게 허한 마음은 봉사와 실천으로만 충만해질 수 있는 겁니다.”

 

시니어들 중 있는 사람은 베풀어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그 베풂은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닌, 바로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