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대하는 신경림 시인의 해법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온하게 삶과 마주하자'

 

 

▲신경림 시인.

 

 

“나는 평생 한 번도 갑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을이었으니까. 그런데 을로 사니까 편안한 거 같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갑이 왜 되냐는 생각이에요.”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는 시인,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시단의 거목. 바로 신경림(申庚林·81)시인이다. 그의 시를 ‘농무’로 처음 접해서였을까? 농부 같고 담백한 인상을 주는 그는 차분하고 소탈한 어조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생활, 세상에 대해 풀어냈다. 그가 말하는 꾸밈없는 삶이 주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올해로 등단한 지 60년.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시인이자 평범한 이들의 벗으로 산 사람. 몇 남지 않은 이 사회의 진정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신경림 시인을 만나는 데는 반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기사에서 요란하게 부풀려지는 게 싫다는 거듭된 그의 고사 때문이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를 물어봤다.

 

 

시인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인생

 

“옛날에 몇 번 다른 것을 뭐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여러 가지 시험해봤어요. 장사도 해보고 시험 공부도 해보고 직장 생활도 해보고. 그런데 내게 맞는 게 없었어.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잘하는 건 시 쓰는 일이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신 시인은 지금도 교사는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학원 선생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영문과 출신이었던 그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굉장히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수업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오 분을 가르쳤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내가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가 없는 선생이었어요(웃음).”

 

신 시인은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을 때였습니다. 칭찬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게 맞아요. 칭찬을 받으니까 ‘아, 정말 내가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해서 자신이 생기고, 그러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시와 교훈적이지 않은 시, 이데올로기에 엮이지 않는 시’를 꼽았다. 한마디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각과는 다른 개성 있는 시, 남이 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시가 좋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소통이 되는 시여야 하죠.”

 

타인과의 소통은 오랜 세월을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신 시인의 지론이기도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해주고 해야지 원수가 되면 안 돼요. 나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재밌거든요? 상대가 엉뚱한 얘기를 하면, ‘어, 내가 생각 못한 거다’ 싶어서 즐겁습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 못해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불편할 때도 많지. 그래도 어떨 때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경림 시인.

 

 

나라가 시끄럽다는 건 나라가 발전했다는 증거

 

사실 문학은 요즘 과거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 본인도 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서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물음에 대해 신 시인은 한 마디로 “걱정 안 한다”라고 대답했다.

 

“유신을 겪으면서 문학계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시대에 앞장 설 수 있는 게 문학밖에 없었기에 그랬어요. 그런데 독재 시절이 끝난 이후로 예술적 문화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문학도 자기가 할 일을 옆으로 분산시켜야 해서, 준 거죠. 걱정할 게 없어요.”

 

그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사회, 야만적인 사회에서의 문학의 역할은 컸지만 그 사회가 지나가면서 문학의 역할이 줄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걱정하면 안 돼. 걱정해도 될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문학은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나라만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는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밖에 없습니다. 경제 발전도 그렇고, 물론 한국 경제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만큼 온 나라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생 시절 절망적이었던 국민 정서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세계에서 꼴찌에서 몇 번째인 나라였어요. 그래서 ‘이런 한국은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많았어요. 민주주의도 못하지, 부패와 독재는 엄청났지. 주민등록증을 하나 떼려고 해도 동사무소 사람에게 담배를 사줘야 했고, 선거 때 되면 자기 표가 자기 표가 아니었어요. ”

 

신 시인은 요즘 모 방송사 사장이 자기 딸과 해외에 나가서 공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식사와 숙박을 하며 논란이 된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사건이 밝혀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은 사회냐고 되물었다.

 

“시끄러우니까 나라가 결딴날 것 같이 얘기하지만, 그렇게 시끄러운 게 나라가 발전한 겁니다. 옛날에는 더 시끄러웠어요.”

 

 

▲한국 문단의 작은거인, 신경림 시인의 60대 시절.

 

 

시의 영감은 생활 속에서 나온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 중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다. 나이가 들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잊었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재발견하게 되는 감성을 신 시인답게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늙어감 자체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신 시인은 굳이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뭘 정리를 하고 그래. 죽음이 예고를 해요? 그거 바보짓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혼자 사는 신 시인의 최근 생활은 등산, 여행,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그는 요즘은 특히 영화를 많이 봤다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강추’했다. 잔잔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득 그 영화가 시인의 시 세계와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시인은 자신이 임화, 백석, 오장환, 이용악의 시 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시상을 뽑아낸 시인들인 것처럼, 신 시인 또한 자신의 시의 영감이 모든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서 시를 쓰는 것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행을 갔다 오면 의무적으로 여행기를 썼어요. 그런데 몇 번 쓰니까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아서, 에이…(쓰지 말자).”

 

 

아내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못 본 남편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산 신 시인이지만, 그렇기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는 항상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그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일로 영화관을 못 간 것을 떠올렸다.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갔는데, 그때는 영화 시작하기 전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게 했어요. 그런데 같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에이 나가자, 더러워서 영화 안 본다’ 하고 아내를 끌고나왔어요.”

 

1971년 3월 1일부터 정부는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를 극장에서 틀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극장에 온 사람들은 기립해야 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남녀의 흐트러진 애정 신이라니,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는 그런 걸 겪기 싫어서 극장을 안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 시인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니 아내가 너무 화가 난 거예요. ‘이 미친 놈이 남들 다 보고 앉았는데 혼자 잘난 체를 하네? 다시는 내가 같이 영화관 안 간다’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70년대, 80년대 영화는 하나도 안 봤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성질이 더러웠지. 아내에게는 그게 가장 미안해요.”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와 함께.

 

 

그는 작년에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을 묶어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냈다. 그 전 해인 2014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은 10쇄를 찍었다. 새로운 책은 아직 계획에 없다고 한다. 즐겁게 생을 누리며 삶과 시가 함께하는 그의 작업을 보면 독자로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듯하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좀 게을러요.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 드러눕고만 있어. 머릿속에 그림을 다 그려놓은 다음엔 ‘에이 뭐 해봤자 마찬가진데’ 하며 귀찮아해서. 다행히 여행하는 건 열심히 하니까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는 다니려고 해요.”

 

신 시인은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아무리 누워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변의 누가 가장 편하냐는 물음에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듣고 혼자서 하는 사색이라든지 무념무상이라든지 하는 멋진 말을 갖다 붙이려고 하자 그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그의 대표 시인 ‘농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골 선비, 한량의 느낌을 받게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떤 가감도 없이 삶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체화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평생 자신의 글과 삶을 일치시켰던 신 시인만의 아우라였다.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프리랜서 오병돈 obdlif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