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없어도 가끔 은행에 갑니다. 자동화기기 앞에 줄을 설 때는 가능한 한 젊은이 뒤에 섭니다. 저도 그렇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대개 행동이 느리니까요. 맨 왼쪽 기기에서 한참 뭔가를 하던 노인이 기기가 이상하다며 투덜댑니다. 노인 뒤에 섰던 사람들이 슬며시 다른 줄로 옮겨갑니다.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1920-1994)의 시가 떠오릅니다.

 

 

노인 돕기

 

오늘 은행에서 줄 서 있는데

내 앞에 섰던 노인이

안경을 떨어뜨렸어(다행히

안경은 안경집에 있었지)

노인이 힘겹게 몸을 숙이기에

내가 말했어

“잠깐만요, 제가 집어드릴게요...”

안경을 집어 올리는데

노인이 지팡이를 떨어뜨렸어

아름답게 윤나는 까만 지팡이였지

난 안경을 건네주고

노인이 비틀거리지 않게 붙잡고

지팡이를 집어주었어

노인은 말없이

내게 미소 짓고는

앞을 향해 돌아섰어.

 

나는 그이 뒤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어.

<https://www.poeticous.com/charles-bukowski/helping-the-old 에서 인용. 필자 번역.>

 

안경과 지팡이를 번갈아 떨어뜨리는 노인도 한때는 젊은이였지만 젊은이들 중에 그걸 아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자신에게도 노인이 될 ‘차례’가 온다는 것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어제처럼 기억합니다. 그때는 돋보기도 쓰지 않고 지팡이도 짚지 않았으니 그런 물건을 떨어뜨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젊은이도 언젠가 나이가 들면 오늘 일을 이해하게 될 테니 노인은 굳이 설명하는 대신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입니다. 멋있는 노인들이 대개 말수가 적은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이성선 시인은 시 ‘문답법을 버리다’에서 아예 ‘말은 똥’이라고 일갈합니다.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山詩>, 이성선, 시와 시학사

 

십대, 이십대엔 묻고 답해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대상을 만난 젊은이는 묻기를 좋아하고 상대가 성의 있게 답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그렇지만 50너머에 이르면 아무리 말을 주고받아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며,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을 알고자 할 땐 말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가만히 바라보고 조용히 쳐다보며 길을 가는 것’이지요.

 

마침내 자동화기기의 작은 입이 통장을 뱉어냅니다. 짧은 숫자가 찍힌 가벼운 통장... 애써 가볍게 걸어갑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빠르게 걸으니 땀이 줄 줄 흐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동네 카페가 나타납니다. 오아시스엔 사람이 많습니다. 이쪽에선 엥엥 사이렌 소리를 내며 아이가 울고 저쪽에선 까르르 까르르 웃음이 터집니다. 사람의 소리가 에너지가 되어 카페를 움직일 수 있다면 카페의 손님들은 아프리카 희망봉까지도 갈 수 있을 겁니다. 요절한 영국 시인 어네스트 도슨(1867-1900)의 시가 생각납니다.

 

짧은 인생은 먼 희망을 품지 못하게 한다

 

길지 않다, 울음과 웃음,

사랑과 욕망과 증오,

아무 것도 우리에게 남지 않는다

우리가 그 문을 지난 후에는.

 

길지 않다, 술과 장미의 나날들,

안개어린 꿈에서

잠시 나타나는 우리의 행로.

다시 꿈속에 닫힌다

--<빅토리아朝 英詩>, 탐구당, 필자 번역

 

어네스트 도슨은 서른두 살에 요절했지만 ‘술과 장미의 나날들’이 길지 않으며, ‘그 문’을 지난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까지, 인생을 거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스물일곱에 아버지를 결핵으로 잃고 이듬해에 어머니의 자살을 본 후 ‘짧은 인생은 먼 희망을 품지 못하게 한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릅니다. 도슨은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목을 쓴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미첼은 이 소설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가제를 붙였다가 도슨의 문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해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미첼이 도슨의 시 ‘시나라(Cynara)’를 좋아해서 그 시의 셋째 연에 나오는 표현을 제목으로 삼았다는 설과, 출판사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하자고 했다는 설입니다.

 

그새 땀이 그쳤습니다. 이젠 ‘울음과 웃음’으로 왁자한 카페를 벗어나야겠습니다. 땀이 흘러도 상관없습니다. 땀은 자꾸 가벼워지는 통장처럼 제가 아직 ‘그 문’을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니까요. 고개를 젖히고 나무와, 나무 너머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남아있는 나날이 얼마일지 몰라도 제 가슴엔 아직 ‘먼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