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가출해버리고 아빠는 아예 없는 집

또 여기 이 엄마도 집을 나가버린다. 어린 자식을 홀로 두고.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열한 살 소녀는 보살피는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어질러진 집 안, 살풍경한 식탁에 홀로 앉아 새까만 삼각 김밥 포장지를 뜯어 한 입 베어 문다. 바스락 찢어지는 김밥 껍질 속에 이미 굳은 밥알을 넘기는 일은 ‘먹는다’기보다 ‘때운다’에 가깝다. 쓰레기통엔 편의점 삼각 김밥 껍데기만 수북하다. 유일한 동거인 ‘엄마’는 밤늦게 술에 떡이 된 채 들어와 짐짝처럼 딸 옆에 쓰러지기를 거듭하다가 몇 장의 돈과 짧은 메모를 남기고 떠나버린다. 소녀는 딱히 놀라지도, 울지도 않고 별일 없는 것처럼 외삼촌의 직장인 서점으로 찾아간다. “또 엄마가 가출했어?” 엄마의 가출은 거듭 된 일일 뿐.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의 시작이 이렇다. 그런데. 이런 장면, 기시감이 확연하다. 저런 엄마, 저런 아이, 저런 집 풍경. 그 동안 영화에서 너무 많이 봐왔던 것.

 

 

제일 먼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예전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장면. 각자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 넷이었던가. 제일 큰 아이가 열두어 살, 막내가 다섯 살 정도인데 그 사이에 둘이나 더 있으니 이 여자는 아이 낳는 것만큼은 부지런하기를 따를 자 없을 정도. 하지만 그 여자, 엄마에게는 다정하고 듬직한 남편이 없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네 아이들에겐 기댈 수 있는 아빠가 없다. 건성일망정, 큰 가방에 숨겨 이사를 들어올망정 아이들을 보살필 유일한 사람은 그녀뿐이다. 엄마는 아직 젊은데다 사랑을 받고 싶은 까닭에 아이들을 두고 바깥으로 떠돌아다닌다. 연애해봤자 뜨내기 같고 책임감 없는 나쁜 남자들을 골라왔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은 해본 적 없다. <아무도 모른다> 엄마도 큰 아들에게 몇 푼을 남겨놓고 무기한 여행을 떠나버린다. 어디로 누구랑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 넷이 번차례로 아프고 머리칼이 함부로 자라나 쑥대머리가 되고 티셔츠 목이 늘어나고 부러진 인형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아빠는? 네 명이나 있어야 당연할 아버지란 존재는 그림자조차 없다. 아이를 여자 혼자 만들 수 없는데도 시작조차 아예 없는 존재가 아빠다.

설정은 조금 다르지만 오오모리 미카 감독의 <수영장>도 그랬다. 엄마 교코는 아직 어린 딸 사요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아예 다른 나라로 떠나서 산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남자를 찾아간 것도 아니다. 엄마는 진짜 딸과 자기 엄마를 떠나 동네 아픈 할머니, 출처모를 청년, 고엄마 찾는 고아 소년을 살뜰히 보살피면서 어이없게 ‘가족’처럼 살고 있다. 버림받았다는 기억에 시달리던 딸은 오랜만에 찾아간 엄마의 집에서 ‘원가족’을 버리고 ‘의사가족’을 꾸리며 살아가는 엄마의 삶을 보면서 아연실색한 채 당황과 혼돈 속의 일주일을 보낸다. 여기에도 엄마는 보이기라도 하지만 아빠라는 사람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일본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인가? 아니.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엄마가 딸을 두고 떠난다. (리틀 포레스트가 일본 만화, 일본 영화 원작을 다시 만든 거지만) 스무 살이 되어 독립할 나이가 된 성인이라지만 여자 혼자 살아가기가 너무나 험난한 작금의 한국 상황에서 엄마가 자신의 삶을 찾아서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떠나는 게 흔한 일은 아닐 터. <리틀 포레스트>의 아빠는 이미 죽어서 부재중인 것이 다른 영화와 다르다.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 같이 살면 다 가족인가요?

<아무도 모른다> 이후 고레에다 감독은 결여된 모성이나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 쪽 이야기에서 방향을 돌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든다. 병원에서 뒤바뀐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랑스런 아들과 부끄러운 아들로 자라났다. 피를 이은 진짜 아들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 내 아들로 알고 키운 남의 아들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 진정한 부성의 변화를 천착했던 감독은 마침내 올해 <어느 가족(원제 만비키 가족-도둑질 가족)>을 만들어냈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어느 가족>의 가장 어린 주인공 여섯 살짜리 소녀의 엄마는 위에서 말한 영화 속 엄마와 판에 박은 듯 닮았다. 그 작은 아이 입에 들어갈 음식하나 안 해준다. 제대로 된 남자를 사귀지 않거나 사귈 수 없고 그래서 아버지는 없다. 어쩌다 집으로 찾아오는 남자는 엄마인 여자를 때리거나 싸운 후 황폐한 사랑을 하고 아이는 집밖으로 쫓아낸다.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에도 엄마인 여자들은 끊임없이 남자와의 연애를 계속하고 그토록 허술한 관계에 집착하면서 어리고 약한 짐승 같은 아이를 보살피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이가 제 집을 제 발로 떠나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서 떨며 잠들겠는가.

엄마라는 것이, 아빠라는 것이, 단 한 톨의 다정함 없이 몰인정하고 철이 없어 어른 역할을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참혹하다. 아무튼 살아있는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맨발로라도 타박타박 걸어 제 살 곳으로 찾아간다. 가족이란 것이 어떤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는, 감옥처럼 스산한 공간을 떠나 온기 있는 사람들의 깃 아래로 찾아가 기적처럼 그 품에 안긴다.

 

 

엄마이기 이전에 엄마도 ‘여자’라는 서글픈 설정, 엄마도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애틋한 상황, 술을 많이 마시고 자꾸만 남자 애인을 바꾸고 어느 날 훌쩍 대책 없이 집을 나가버리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저 영화들 속에 모름지기 생물학적 여자로 태어나면 생득적으로 ‘모성’을 갖고 있을 거라는 믿음은 없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억척같이 일하고 남자 따위 연연하지 않고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살 거라는 엄마-여자에 대한 고상한 이미지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들이 모성이 결여된 여자, 엄마다움을 실현하지 않는 여자들을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는다. 철없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의 추레한 입성과 거친 먹거리, 더러워지고 어두워지는 집 풍경 같은 참혹한 풍경을 고발하듯 따라가지만 이상할 만큼 여성혐오 모성혐오로 매듭짓진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에게도 자기 삶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무책임하기로야 엄마보다 아빠가 더하다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다큐를 찍듯 이야기는 여자와 남자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당연한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낳아 엄마, 아빠,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관계의 지평을 바꾸거나 넓히거나 깊게 해보려는 쪽으로 아이들 보폭처럼 타박타박 걸어 나간다.

 

엄마가 될 수 없고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준 불꽃송이

<어느 가족>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철거 직전의 폐가다. 어둡고 좁은 그 집에 모양새로는 가족으로 제격인 할머니에 손녀, 엄마 아빠로 보이는 남녀가 있고 길거리에서 ‘주워 온’ 소년이 아들처럼 살고 있다. 엄마에게 내쫓겨 한 데서 떨던 어린 소녀도 들어와 딸처럼 안착한다. 그 좁은 집에서 컵라면 한 개, 어묵 한 꼬치를 먹더라도 반드시 같이 머리를 맞대고 먹는다. 옷을 만들어 입히고 같이 목욕을 한다. 드러난 학대받은 상처를 서로 만져주고 소리만 들리는 불꽃놀이를 상상으로 같이 본다. 동굴 같은 그 집에서 하늘에서 팡팡 터지는 불꽃은 볼 수 없지만 이미 사람들이 불꽃이다. 아빠역과 아들 딸 역할처럼 사는 이들은 도둑질을 한다. 양 손가락을 모아 훔칠 물건 앞에서 소년과 소녀가 무사히 물건을 훔칠 수 있도록 주문을 걸 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잠시 도덕적 강박을 버리고 그들의 도둑질이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르칠 거라곤 도둑질밖에 없었다는 남자와 남의 집에서 데려온 아이를 제 자식처럼 키우는 여자는 직장에서 잘리면서도 진짜 딸인 양 포기하지 않는다.

도둑질이나 과실 치사 같은 부도덕한 일, 죽은 할머니를 매장하지 않고 집 뒤에 묻어버리는 참혹한 행위를 남들은 이해 못해도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살아온 당사자들은 이미 납득하고 이해하고 고마워한다. 할머니가 이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말은 ‘고마워, 같이 살아줘서’이고 ‘원가족’ 아빠와 엄마에게 돌아간 소년과 소녀의 마지막 말도 소리 없이 불러보는 ‘아빠’와 ‘엄마’라는 말이다. 뿔뿔이 흩어져 진짜 남이 되어버린 어느 가족의 구성원들은 기적처럼 따스하고 행복했던 철거 직전의 동굴 같은 집을 그리워한다.

 

좀 특이한 여자가 털실로 만들어준 핑크 가슴 두 개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의 열한 살짜리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외삼촌의 집에는 그 동안 못 보던 ‘여자’가 한 명 살고 있다. 외삼촌 말에 의하면 ‘좀 특이한 사람, 그러나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였다가 수술로 여성이 되었다고 밝힌다.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그 여자는 매일 털실을 짠다. 화 날 때마다, 사람들의 편견에 상처 입을 때마다, 남들과 달라 손가락질 받을 때마다. 손가락이 남근 모양의 길쭉한 주머니 108개가 될 때까지. “그 주머니는 내 번뇌야.” 린코는 엄마가 가출해 같이 살게 된 소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진짜 엄마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자신은 여자여도 엄마가 될 수는 없고 소녀는 엄마가 버렸으니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이미 사랑하게 되고 보니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어졌다는 외삼촌과 만들어 달았다는 가슴을 선뜻 내미는 린코에게서 엄마를 느끼는 토모는 같이 털실을 엮는다. 강변에서 모닥불을 환하게 피워 탑처럼 쌓은 108개의 번뇌를 태우는 시간은 영화의 백미.

토모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진짜 엄마와 살러 린코 곁을 떠난다. 엄마의 돌봄을 기대하지 않고 엄마에게 엄마가 되어주려고.

그새 엄마도 철이 들었던 걸까. 돌아온 집은 정갈하게 치워져 있다. 그 어두웠던 거실 식탁에 앉아 소녀는 린코가 이별의 선물로 안겨준 꾸러미를 풀어 올려놓는다. 새까만 삼각 김밥 대신 핑크 빛 동그란 가슴 두 개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포도 같은 두 개의 젖꼭지가 눈동자처럼 반짝이는 털실로 엮은 린코의 가슴이다.

 

가족의 자격이 어디 핏줄만이겠는가

일본의 유명 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책에 썼다. 그렇기도 하지. 가족으로 엮였다고 그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이 퐁퐁 솟아나는 건 아니니까. 같은 공간에 산다고 서로 보살피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실 피를 나눴다고 꼭 같이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모름지기 가족이므로 사랑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가 진저리치게 힘든 관계를 만들기도 하니까. 엄마여도 아빠여도 자식이어도 남보다 못한 관계로 사는 이도 있고 진짜 가슴을 가지고도 온기 하나 나눌 줄 모르는 이도 있고 실리콘으로 만든 조금 딱딱한 가짜 가슴으로도 부드럽게 안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가족이어도 칼로 살을 긋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생판 모르는 남이어도 그 상처를 핥아줄 수 있다.

그래서 ‘버려진 것은 줍는 사람이 임자’라는 도둑질 가족의 아빠 말은 도덕적이진 않지만 ‘임자’라는 단어가 소유를 뜻하는 게 아니어서 위로가 된다. 버리는 사람이 있고 줍는 사람이 있고, 소중하게 대해주고 아껴주면, “그렇게 가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