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 걷거나 힘든 산을 오르면 몸은 지치고 힘들다. 나의 몸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나를 비워낼 때, 비로소 나의 정신이 그동안 나에게 고착된 것들을 버리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나를 하나씩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나를 잊고, 또 잃어버리는 이 과정을 통해 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오상아(吾喪我) 아닐까? 해방된 나는 오만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점유하지 않는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때 그 어디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 나로부터도 해방 되었는데 무엇에 집착하겠는가? 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오상아(吾喪我)의 실현은 이렇게 오롯이 걷고, 먹고, 씻고, 자고를 반복하며 나에게 절대자유의 삶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했다. 

 

그렇다면 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상은 내 몸과 정신이 잃어버린, 잊고 온 나를 순간순간 기억해낸다. 그럴 때 마다 배낭을 메고 산으로 둘레길로 나선다. 배낭을 메고 멀리 떠날 수 없을 때 잠깐이지만 나를 오상아(吾喪我)로 이끌어주는 곳이 있다. 인왕산 둘레길에서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작은 암자에 석굴암이 있다. 짧은 코스지만 땀을 내어 올라가면 청와대도 빌딩도 내 발 아래 드리우는 곳에서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며 나로부터 해방됨을 순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도심 한가운데 놓여있는 지금, 나로부터 해방되는 그 곳. 인왕산 석굴암으로 떠나보자.

 

 

 

광화문 사직단에서 외쪽으로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간다. 이곳에서 석굴암까지 거리는 1.5km다. 천천히 인왕산 둘레길을 따라 500여 미터 올라가면 황학정(국궁전시관)이 나온다. 지금의 황학전은 원래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22년 인왕산 동쪽 기슭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주중엔 한산하지만 주말에는 국궁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기도 하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길을 내어 걷는 동안 상쾌함이 가득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광화문의 직장인들도 산책하는 코스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구두를 신고 걷는 사람도 보인다.

 


 

황학정에서 700여 미터를 걷다보면 석굴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수성동 계곡을 통해서 서촌으로 바로 내려갈 수도 있다. 둘레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청운공원을 지나 부암동, 창의문으로 연결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왼편에 위치한 작은 철문을 보면 열려있는 틈 사이로 계단이 보인다. 이곳에서 석굴암까지 400여 미터가 모두 계단으로 되어있다. 석굴암을 오르며 이 계단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단체로 온 산악모임 사람들은 수많은 계단을 떡과 과일, 음료 등 박스를 메고 올라가기도 한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소풍을 오기도 하는데, 대부분 학생들 보다는 인솔하는 선생님들이 더 힘들어 하며 오른다. 연 초에는 계단에서 만난 석굴암 노스님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시더니 내 사주를 봐주시기도 했다. 좁은 계단이다 보니 서로 양보하고 때로는 피해가 되지 않도록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이 계단을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다. 석굴암에 도착하기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바위가 있고, 이곳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 물 한 잔을 마신다. 발아래 펼쳐진 풍경은 짧은 시간에 올라온 것에 비해 시원하고 아름답다.

 

 

이 언덕 작은 바위는 항상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온 나를 가볍고 여유로운 길로 이끌어 준다. 여기서 마지막 계단을 통해 석굴암에 이르면 조그마한 마당이 있고, 마당 오른편으로 인왕산 석굴암이라는 명패가 보이고 굴 속에 부처상이 세 개가 놓여있다. 절에 다니는 친구들과 석굴암에 오면 친구들은 이 곳에 들어가 절도 하고 기도도 한다. 마당에 연꽃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님이 나오셔서 석굴암에 있는 5가지의 명품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한반도에 산이 많은데 첫째로 인왕산은 명산이라. 둘째, 석굴암 터가 명터이고. 셋째로 물이 명물이라.

넷째는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명품이라. 마지막으로 저 옆으로 천향암이라고 있는데 꼭 둘러보세요.

100미터 가면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지만, 그냥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가면 좋아요.

30~40년 이곳에 사는 사람도 몰라서 못 오는 사람 많습니다. 하지만 한번 온 사람은 반드시 다시 옵니다. 정말 좋아요."

 

석굴암 마당에서 스님과 나눈 따뜻한 대화였다. 스님이 꼭 둘러보라는 천향암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왔다.

 

 

빌딩 아파트 숲 속에 살고 있다면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잊을 수 있는, 잃어버리는 여행을 위해 도심 속 석굴암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