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은 지난날에 대한 후회로 씁쓸한가 하면 새해에 대한 기대로 살짝 가슴이 떨리기도 하면서 여전히 조금은 낯설고 그래서 새롭습니다.

새해 달력에 가족들 생일이며 대소사를 적어 넣고 보니 지난 한 해 있었던 일들이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저는 연말에 어르신들과 수업을 하면서 그리고 이런 저런 송년모임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기준으로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해 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을 죽 꼽으면서 그것이 희로애락, 즉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 중 어디에 속하는지 분류해서 정리해 보는 것입니다.

이 ‘희로애락’ 분류는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맘대로 나누는 겁니다. 남의 의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주관적인 분류와 정리를 통해 그 일이 있었던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진심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낯선 지역으로의 이사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주는 기쁨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은 일이었다면 슬픔과 노여움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은퇴가 낙담과 슬픔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오랜 수고를 칭찬하는 마음과 함께 모처럼 찾아온 휴식과 여유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혼자서 하든 여럿이 둘러앉아서 하든, 슬프고 화나는 일을 모르는 척 없었던 것으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른스럽게 잘 해결하는 방법과 앞으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배운다면 그 자체가 소중한 자산입니다. 또한 좋았던 일과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통해 열심히 잘 살아온 한 해의 삶을 칭찬하고 감사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50+모임에서 ‘희로애락’과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온 단어 세 가지를 꼽는다면 “은퇴, 건강, 가족”이었습니다. 은퇴 전후의 고민과 두려움, 변화에 대한 막막함 또는 이후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요. 그런가하면 갑작스런 발병과 건강에 적신호가 와서 놀랐다는 이야기, 위기를 넘기고 건강을 되찾아서 다행이며 앞으로 건강관리 잘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 역시 많았습니다. 가족에 대한 것은 부모님 걱정에 자녀들 걱정까지 더해져 다들 어깨가 무겁다고 했습니다. 자녀들 독립 후 부부 둘만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 부부관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때이지만, 위로는 연로하신 부모님에 아래로는 취업과 독립이 어려운 자녀들까지 돌보고 챙겨야 하는 낀세대의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함과 동시에 2019년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시간을 이어서 가졌는데, 역시 맨 앞에 나온 단어는 건강과 가족이었고 이어서 여행을 많이들 꼽았습니다. 나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간절함, 위로 아래로 가족들 모두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망 그리고 그동안 이리 저리 매여 살았기에 여행의 자유와 홀가분함을 꿈꾸는 것 또한 모두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실천 목록에 적으셨나요? 세부 목록이야 당연히 개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저는 50+가 새해 계획을 세울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 몇 가지만 꼽아보려 합니다.

 

 

 

 

 

 

 

 

 

 

 

 

 

 

 

마음 청소.

하루에도 몇 장씩 받은 명함이 늘어나고 휴대폰에 저장해야 할 전화번호도 쉬지 않고 생겨납니다. 살림살이도 더는 늘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지만 둘러보면 어느 새 또 늘어나 있습니다. 가능하면 책을 사지 않고 빌려 보겠노라며 새로 생긴 동네 도서관에 한걸음에 달려가 회원증도 만들었지만 책꽂이는 넘쳐나고 책상 위에는 책이 높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쌓여가는 번잡함은 훨씬 더 많습니다. 결심한다고 곧바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도 좀 정리하고 씻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을 씻어내고 털어내고 덜어낼지는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정하고, 청소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죽음준비교육 과정에는 용서와 화해와 감사가 늘 포함되는데, 사실 용서와 화해와 감사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중간 중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단, 용서와 화해와 감사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과도 해야 합니다. 나의 실패와 실수와 부족함을 스스로 용서하고 받아들여 화해하고, 살아온 시간과 살아낸 세월을 감사하며 칭찬하는 일이 50+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같은 일을 겪고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게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세상사 이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손님과 주인은 물론이고 직장의 윗사람과 아랫사람, 가정에서의 부부와 부모 자식, 친구들이 그렇습니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인데 상대방은 서운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고는 당황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하고 하소연을 했는데 괜한 어리광이라며 면박을 주면 다시는 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누군가와 불편하게 지내고 있다면 역지사지로 한 번 뒤집어 보면 그 까닭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존재라서 고의로 혹은 무심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 아프게 만드는 일이 많은데, 역지사지를 통해 그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습니다.

 

감정노동.

육체노동과 정신노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노동도 있습니다. 감정을 잘 표현하고 부드럽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상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래야 마음을 열고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떤지를 살피고 모르거나 궁금하면 물어봐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노동’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고, 건강하게 땀 흘린 노동 뒤에 보람과 열매가 뒤따르는 것처럼 감정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중추적인 자리에 있는 50+들은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돌아보고 정리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니면 불편하게 지냈던 사람을 위해 기꺼이 감정노동을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땀 흘려 일해야 밥을 얻듯이 감정노동 없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다시 시작.

그동안도 그래왔듯이 올해도 어차피 모든 것이 작심삼일로 끝나버릴 거라고, 그저 그렇고 그런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지레 포기하거나 기대를 접어버릴 일은 아닙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금쪽같은 하루하루를 실망과 포기로 색칠하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 주위상황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낙심할 때가 있더라도, 자신을 애써 일으켜 세워야 하는 까닭은 그 누군가에게는 이 날조차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해야말로 다시 시작할 결심을 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아침이면 변함없이 해가 뜨고 날이 밝지만 12월 31일과 1월 1일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해마다 확인하곤 합니다. 반백년 살아온 50+가 좋은 것은 살아갈 반백년이 다시 또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며 나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