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C궁능성시 이야기여행(50)

융릉과 건릉에서 만나는 정조와 고종의 아버지 이야기

 

   정조와 고종은 모두 아버지가 둘이다. 생부와 양부를 각각 두었다. 왕이 되기 위한 규범에 따른 것이다. 아버지가 왕이거나 최소한 세자여야 왕이될 수 있었기에 정조는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입양되어야 했다.

 

   조선의 규범은 아버지가 왕이 아닌 경우는 아들이 왕이되면 생부와 양부를 막론하고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성종의 생부 의경세자는 덕종, 인조의 생부 정원군은 원종, 헌종의 생부이며 고종의 양부인 효명세자는 문조 그리고 정조의 생부 장헌세자는 장조, 양부 효장세자는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아들이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 추숭되지 못한 예외로는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3명의 경우가 있다. 이 가운데 덕흥대원군과 전계대원군은 본인들 사후에 아들이 왕이되었기에 살아서 대원군이 된경우는 흥선이 유일하다.

 

   정조와 고종은 1752년, 1852년 정확히 100년의 차이를 두고 탄생하고 두명의 임금은 생부가 아닌 양부의 아들로 즉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생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나타낸다.

 

   정조는 1762년 11세 되던 해, 임오화변으로 아버지를 잃고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아들이 된다. 1776년 22대 임금으로 즉위하는 순간 15년간 숨겨 온 그리움을 정조는 왕이되자 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실토한다. 이를 시작으로 정조임금의 사부곡은 현재에 이르도록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된다. 1776년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신원회복시키고,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이어 1789년에는 영우원을 현재의 자리인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천장하고 왕릉보다 화려하게 생부의 묘소를 조성한다. 이후 승하하는 1800년까지 12년 동안 13번의 원행을 하는 등 극진한 효성으로 조선임금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효심을 보이며 효심의 아이콘이 된다.

 

   고종은 1863년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양되어 26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생부인 흥선대원군에게 왕권을 내어주고 10년, 1873년 친정을 시작하고 25년, 1898년 흥선대원권이 사망할때 까지 부자간의 왕권 쟁탈전은 끝이지 않았다. 부자간의 반목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절정을 찍는다.

 

   고종은 1899년 현륭원을 융릉으로 격상한다. 정조의 생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했기 때문이다. 정조임금은 아버지를 신하들의 반대로 임금으로 추숭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 장헌세자를 융릉이 아닌 현륭원에 모실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10년 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 장조는 임금을 넘어서 황제가 되는데...고종은 황제가 되고 4대 조상을 황제로 추숭하기로 한다. 마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4대 조상인 목,익,도,환조를 왕으로 추숭한 것과 같다. 역시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는데 고조의 양부인 문조, 조부인 순조, 증조부인 정조 그리고 고조부인 장조가 그 대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부의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두 임금의 태도는 사뭇 달랐지만 정조 부자와 고종 부자의 무덤은 각각 화성시, 남양주시에 같은 도시에 자리잡고 있다. 정조와 장조, 고종과 흥선대원군 두 임금의 부자간의 이야기가 단지 흥미롭지만은 않은 것은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 가진 권력에 대한 속성이 천륜도 저버리게 한다는 씁쓸한 진실을 발견하게 되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과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3월 16일 개최되는 JHC의 궁능성시이야기 투어에 참가하면 들을 수 있다. 한편 JHCKOREA가 주관하는 궁능성시이야기 여행은 2016년부터 시작되어 이번 여행으로 50회차를 완성한다. 이번 투어와 상반기 참가신청은 www.jhckorea.org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