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월출산 등산을 겸한 강진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세대에게 ‘봄’ 하면 떠오르는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봄이 무르익는 산에서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나무들도 저마다 초록으로 물드느라 분주했다. 그 풍경이 하도 곱고 찬란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강진은 답사일번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려청자를 빚던 가마터부터 조선시대의 군사적 중심지인 병영, 정약용의 유배지 등 수많은 역사유적과 드넓은 평야와 산, 바다와 갯벌이 제공하는 풍부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강진과 이웃한 영암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고을이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영암아리랑’을 기억하지만 그것은 구전되는 아리랑이 아니라 하춘화라는 가수가 부른 대중가요이다. 영암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도 지역의 중심지였고 일본이나 당나라로 가는 뱃길의 출발점이자 국제 교역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간척사업과 영산강하구둑 건설로 그 포구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영암을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백제 때 일본에 학문을 전했다는 박사 왕인(王仁)을 들 수 있다. 그는 4세기경 일본으로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왜의 왕 응신(應神)의 아들인 우치노와 기로쓰코(兎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풍수설의 대가이자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 초까지 활약한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는 영암의 대표적인 절집으로 해탈문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오래된 사찰답게 절 뒤편의 부도전에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승탑들이 즐비해 다양한 형태의 승탑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최근엔 낙지와 무화과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며 영암을 알리는 중이다.

 

 

월출산 도갑사                                                                                                                              도갑사 승탑들

 

내가 30년 만에 월출산 등산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지난 2월, 설을 쇠러 영암의 고향집엘 다녀오면서 월출산 사진을 몇 장 찍어 산우회(山友會) 단체방에 올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동문 답사팀까지 합류해 1박 2일의 강진영암 답사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답사팀이 제공한 차량 덕분에 우리 일행은 산행 외에도 강진과 영암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긴 일정 탓에 아침 6시 30분에 서울을 출발, 김종률의 <영랑과 강진>이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남으로남으로 달려 길을 달려 12시가 넘어서야 강진 병영(兵營)에 도착했다.

 

첫 목적지 병영은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의 준말로 병영성(兵營城)에는 조선시대의 무관인 병마절도사가 머물면서 전라도와 제주도의 육군을 총괄하던 사령부가 있었다. 그것이 지명으로 굳었다. 병영성(兵營城)은 하멜과도 관계가 깊다. 그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길에 제주도에 표착했다. 1653년 효종 4년의 일이다.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 38명을 조사한 후 서울로 압송했다. 이원진은 <성호사설>을 쓴 실학자이자 다산 정약용이 평생을 사숙했다는 이익의 큰아버지다. 서울에서 다시 병영성으로 이송된 하멜은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7년을 병영에서 머물렀다. 그 인연으로 강진군은 하멜의 고향 호르큼 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병영성 바로 옆에 하멜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 옆, 오래된 마을에는 하멜 일행이 쌓았다는 독특한 형식의 담이 남아 있다.

 

하멜의 돌담. 담을 쌓은 형식이 전통방식과 다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행적을 적어 제출한 보고서로 당시 조선의 상황과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묘사해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 이유로 <하멜표류기>보다는 <하멜의 보고서>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병영 구경을 마친 우리가 향한 곳은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백련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39년(문성왕 1)년에 창건된 사찰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불렸다. 고려시대에 요세(了世)라는 승려가 중창한 후, ‘백사결사(白蓮社結社)’를 결성했는데 이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더불어 불교의 수행운동의 쌍벽을 이루었다 한다. 백련사가 고려시대 120년 동안 8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하니 사세(寺勢)를 짐작할 수 있다.

백련사의 누각인 만경루(萬景樓)에 오르면 강진만의 바다가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백련사의 매력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숲이다. 4월경이면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빨간 꽃을 피우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들지도 않은 채 빨갛게 떨어지는 동백꽃은 처연하리만큼 아름답다. 5월임에도 우리를 기다린 듯 뒤늦게 피어난 동백꽃을 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백련사 배롱나무 사진          

 

만경루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강진만과 바다가 보인다.

 

백련사 동백꽃을 보며 어릴 적 우리 집 뒤뜰에 피었던 동백꽃을 떠올렸다. 동백꽃이 피면 나와 동생들은 떨어진 꽃을 지푸라기에 꿰어 꽃목걸이를 하고, 가을이면 마당에서 떨어진 동백씨를 주웠다. 엄마는 그걸로 기름을 짜서 할머니랑 외할머니 그리고 동네 할머니들께 나눠드리곤 했다. 내 할머니들은 이른 아침이면 참빗으로 머리를 빗은 다음 동백기름을 바르고는 곱게 쪽을 짓고 하루를 시작하시곤 했다. 이제는 쪽을 지고 비녀를 꽂은 할머니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 우리 집 마당에 동백이 떨어져도 누구도 예전처럼 열심히 줍지 않는다. 파마머리를 한 엄마에게는 동백기름이 필요 없고 우리 자매들도 모두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숲길로 연결된다.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그 길엔 동백나무, 편백나무, 야생차나무, 황칠나무 등이 즐비하다. 산길을 걷다가 대나무가 보이고 대나무 숲을 지나면 정약용(1762~1836)이 유배생활을 한 다산초당이 나온다.

 

  

다산초당 가는 길의 이정표                                                                       다산초당 가는 길에서 만난 편백, 차나무, 대나무, 동백나무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노론의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자 유배에 처해졌다. 1801년 신유박해로 그의 셋째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참수당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신안 우이도로, 자신은 포항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은 머물 곳을 구할 수 없었다. 정약용은 그런 상황을 “백성들이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고 편안히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다산신계>에 적고 있다. 그는 가까스로 동문 밖 주막에 방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 4년 동안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후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난 1818년까지 10년간은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에서 지냈다. 다산은 외가인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다산초당(茶山草堂)을 마련했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다산초당 현판

 

다산은 서른 살에 유배에 처해졌다가 마흔 일곱이 되어서야 강진을 떠나 고향 남양주 마재(마현)로 돌아갔다.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30~40대를 대부분 유배지에서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배 18년 동안 <목민심서> 등 수백 권의 책을 쓰며 학문에 정진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우뚝 섰다. 다산의 유배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하피첩의 사연 또한 기구하다. 다산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던 하피첩은 6.25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2004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폐지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있음을 알아차린 한 건물주가 그것을 손에 넣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곡절을 거쳐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한 경매에서 7억 5천 만 원에 낙찰 받아 소장하고 있다. 하피첩은 보물 1683-2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은 초당에 머물면서 백련사의 혜장스님,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했다. 다산은 산길을 걸어 백련사로 가서 혜장 스님과 차를 마시며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다산초당에는 김정희가 다산 정약용을 보배로 여긴다는 의미로 쓴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보정산방 현판 사진                     

 

 작은 연못에 동백꽃이 떠 있다.

 

다산초당은 산 중턱의 넓지 않은 터에 건물 두 채와 작은 연못이 있어 나름 격식을 갖추었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1985년 내가 다산초당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초가지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기와지붕으로 바뀌어 초당이라는 이름이 어색하게 되었다. 1985년 강진에서의 농촌활동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다산초당엘 들렀다. 당시 초당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해남 윤씨 정치가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우리와 밤늦게까지 시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우리 일행을 초당에서 재워주었다. 초당 마루에 앉아 그 시절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했다.

 

다산초당을 내려온 우리는 마량으로 향했다. 마량포구에서 다리를 건너 고금도로 갔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무사에 가기 위함이었다. 충무사 옆에는 노량해전(1598)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가매장했던 터가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수군 본영이 있던 그곳에 80여 일 동안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충남 아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군의 가매장 터는 소나무 숲 한가운데 있었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깃든 어둠이 항구의 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몽환적이고도 신비한 풍경을 자아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상이 더해져 우리는 한동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어둠이 깃든 충무사 근처의 이순신 장군 가매장터 소나무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