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호국의 의지가 가득한 강화 전등사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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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강화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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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 절 이름이 왜 전등사예요?”

지금은 성년이 된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물었던 말이다.


그 뜻을 자세히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검표원 아저씨가 기특해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불교에서 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을 전하는 사찰이다”

라는 뜻으로 전등사라고 했다고 알려주었다.

 

 나에게 있어 이 전등사는 의미가 각별하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1박 2일 수학여행을 벗들과 함께 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충격이 심한 상태였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이곳을 방문케 되어 따뜻한 은사의 정을 느끼게 해준 곳이다.

 또한 아이들 키우느라 힘이 부친 아내의 부담을 줄여주려 아이들과 함께 했던 휴일문화탐방의 첫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이들 수능시험 때 아이들을 위해 108배를 했던 곳이며, 정신적으로 힘들 때 찾으면 늘 위안이 되던 장소이기도 하다.

 

 초하인데도 불구하고 온도계가 30을 넘게 가리키는 6월 초,

순천에 살고 있는 선배가 무작정 찾아와 전등사와 맛집을 안내하라고 해서한동안 멀리했던 전등사를 다시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이 절은 큰길에서 올려다보면 숲속에 건물 한두 채만 얼핏 보일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입구까지 가려면 숨이 가쁘게 올라야 하지만,

소나무 숲에서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만져주고 나무로 뒤덮인 운치 있는 풍광이 가슴을 뻥 뚫어 준다. 

 


- 보이는 곳마다 보물, 들리는 것마다 전설  -


 이 절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대웅전을 떠받들고 있는 나부상 때문이다.

마루가 낮은 대조루로 인하여  몸을 낮춘 채 다소곳이 만나게 되는 대웅전(보물)의 네 처마 끝에는

대웅전을 떠받들고 있는 나부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다 다르다.

웃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슬픈 얼굴도 있고, 두 손을 올리고 벌을 받는 듯한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바친 것도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상상을 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 조각상에 대해서 이설이 많다.

절 중수를 책임졌던 도편수가 사랑했던 여인이 결혼 자금을 모두 가지고 도망쳐서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나부상을 조각했다는 설과

부처님의 말씀을 들 으며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라는 뜻으로 조각했다는 설,

대웅전을 지키는 원숭이라는 설, 고려 정화궁주를 쫓아낸 원나라 공주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 네 처마 밑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나부상


 또 처마에는 걸쇠가 달려 있는데 문을 들어 올려 걸도록 되어있어 더 많은 햇빛이나 바람이 들고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천장에서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민 용과 불상을 안치 하는 수미단 하단에 새겨진 익살스러운 도깨비 표정 등도 관심을 끄는 것들 중 하나다.

 

 경내를 걷다보면 이 절에는 있어야 할 절의 상징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절에 는 속세와 불국토를 구분하는 상징인 일주문이 있는데 이곳에는 없다.

더군다나 금강문이나 불이문, 사천왕문도 없다.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정족산성) 문중에 문루가 남아있는 남문이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남문                          ▲ 음통이 없는 범종(사진: 두산백과사전)

 

 절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무거운 비석을 짊어진 받침돌로 용의 맏아들이라는 비희(귀부라고도 며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 좋아한다)가 없다.

게다가 절 사물과 달리 따로 자리 잡고 있는 범종에는

용의 셋째아들 포뢰(울기를 좋아 하고 고래를 무서워 한다)가 두 마리 마주 서 있으나 음통이 없다.

중국에서 건너온 종이라는데 역사가 오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반면에 다른 절에는 없는 독특한 것이 많다.

남문을 통해 전등사를 오르다 보면 한 번 돌리면 그 안 에 들어있는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는 윤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윤장대는 글을 몰라 불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 윤장대(재현한 복제품)                                         ▲ 오래된 은행나무(노승나무)               
    
 그 앞쪽에는 무리한 관가의 은행 송출 요구에 대응하여 스님의 도력으로 열매를 맺지 않게 하여 세금 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을 품은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리고 있음)가 서있다. 
  

 

- 역사와 호국의 의지가 서려있는 땅 -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때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한 때부터 호칭을 전등사 로 바꿨다는

현존 최고의 사찰인 이 절은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에 안겨 있다.

솥을 거꾸로 얹어 놓은 듯한 형태의 삼랑성은 정족산과 주변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해 축성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피난지, 항전지, 복지로도 유명하다.

 

 돌 한 덩어리, 흙 한 줌까지 몽고침략, 병자호란, 병인양요 등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이 절의 남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큰 소나무에는

일제강점기 때, 송진까지 공출당했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람뿐 아니라 식물들까지도 수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 송진 공출의 상흔이 남아있는 소나무                         ▲ 대웅전 기둥에 남아있는 묵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환란은 끊이지 않은 외세의 침략이다.

강화도는 김포반도와의 사이에 염하(일명 염하강)라는 강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는 폭이 좁은 바다를 끼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외세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 노릇을 여러 차례 하였다.

 

 그래서인지 절 곳곳에 호국의 유적지가 많이 있다.

남문 바로 앞에는 병인양요의 영웅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고,

대웅전 기둥과 벽에는 전쟁에서의 승전과 자신의 안위를 기원한 병사들의 이름 등이 묵서로 남아있다.

전등사 서쪽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정족산사고지가 있어 이곳이 호국의 의지가 드높은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 에필로그 -

 

 절의 위치가 높아서인지 동문과 남문 사이에 있는 유적지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돌아보는 문화유적 탐방이 끝나면 저절로 배가 출출해진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지방마다 특색 있는 향토음식을 먹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 근처에서 바로 만날 수 있는 산채비빔밥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인근 강화읍에 들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쫄면, 백반, 젓국갈비)을 찾아

배를 호강시켜 준다면 전등사로의 문화유적탐방은 맛과 멋을 함께 할 수 있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문화유적지로 기억될 것이다.

 

전등사 대웅전을 나오면서 나부상을 조각했다는 도편수라는 사람을 상상하다 보니, 언젠가 방영했던 TV 연속극 “왕룽일가”가 떠올랐다.

그 드라마에서 도시형 여인 교하댁에게 토지보상자금을 쥐어주고,

사기를 당해 황당한 얼굴로 하늘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던 왕룽(박인환 분)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나 홀로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전등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