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생활의 리듬

 

정상오

 

“당신은 생활이라는 리듬에 어울리는 곳에 살고 있습니 까?”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저는 “네, 그런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각각의 리듬이 있습니다. 봄바람이 불어올 때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듯, 빨간 양귀비 꽃잎 속에서 노란 꽃가루에 푹 빠져 꿀을 모으는 앙증맞은 벌들의 움직임처럼 크기와 모양에 맞는 저마다의 속도와 율동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리듬들이 무수히 존재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직장에서 집까지 그 곳엔 무수히 많은 틈이 존재합니다. 건물, 길, 나무, 차, 사람들처럼 장소와 공간에는 틈이 있습니다. 이 틈 덕분에 리듬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틈에는 우리 동네만의 독특한 느낌과 색, 기분 같은 것이 있습니다. 회사를 출발해서 15분 정도 운전을 하면 ‘우리 동네’에 도착합니다.

주차를 하고 100여 미터 떨어진 우리 집으로 가는 동안 이웃집 사람들과 눈을 맞추어 안부 인사도 하고, 길에 떨어진 나뭇가지도 줍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놓고 간 자전거를 한쪽에 치워 놓습니다.

“안녕하세요, 형님 올해는 비가 제법 와서 고추랑 토마토가 제법이네요”.

“그러게 대신 풀도 많이 자라서 부지런히 김을 매줘야 하겠어”.

“그러게요, 형님 수고하세요.”

이 정도 되면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도 스르륵 사라집니다.

우리 집은 우리 동네 왼쪽 끝집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계단을 두 단 올라서서 네 걸음을 걷고, 다시 오른쪽으로 두 계단을 올라서서 이십보정도 걸으면 집 앞 온실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깜선생 완전히 까만 고양이-아마도 러시아산 고양이 같아요-이 제일 먼저 반겨줍니다.

“야아 오옹”

“응 깜선생 밥줄까?”

깜선생은 기대하던 답변을 듣고는 나에게 몸을 비빕니다.

어린이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아빠 왔어요!”

“응 어린이, 아빠 왔어요, 우리 딸”

우리 집에 도착하는 풍경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올 때 모습이 있고, 눈이 오면 눈이 올 때 움직임이 모두 다릅니다.


여기서 잠시 저의 신혼시절 퇴근 모습을 살펴볼까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서면 101동에 제일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까지 20보정도 걸어갑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같은 동 이웃들과 눈인사만 잠시하고 어색한 듯이 눈을 둘 곳을 찾습니다. “8층입니다”하는 안내음이 나오면 고개만 살짝 숙인 채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옵니다.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 4자리를 꾹꾹 누릅니다. 거실 창에서 멀리 보이는 낯 익은 풍경들은 내가 이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매일 똑같은 풍경이었죠.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Carl Jung은 집과 자아의 연관성으로서 ‘집은 마음의 모델’과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집을 떠나면 집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느끼게 됩니다. 혹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있는데도 또 다른 집을 꿈꾸고 계신 가요?
적어도 지금 나는 또 다른 집을 꿈꾸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우리 동네이고 우리 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곳에 살고 있습니까?”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이웃이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 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30명의 이웃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변 원주민 마을도 살펴보면 30~50명 내외의 작은 동네들입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과 친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적인 인구수 말고 정情을 나눌 수 있는 규모의 수라고 할까요?

우리 동네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수도권의 남부 지역, 경기도 안성에 있습니다. 자연환경이 남아 있는 작은 지역이죠. 용인과 평택, 천안과 충주 사이에 있습니다. 안성에서 발원해서 평택, 아산까지 흐르는 안성천을 따라 사람들이 살고 있 습니다. 인구는 18만 명이고, 의료생활협동조합이 전국 최초로 만들어져서 조합원만 6,000가구가 넘는 곳입니다. 10명중 1명이 의료생협의 조합원입니다. 우리 가족도 이 곳에서 편안하게 치료를 받고, 조합원 모임에도 참여합니다. 

프랜차이즈 대신에 정과 맛으로 승부하는 내공있는 단골 음식점에 가면, 열번 중 한번 이상은 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동네 입니다.

규모가 큰 곳에서는 존재가 뛰어나야 도드라지겠지만, 지역에서는 평범하고 성실하기만 해도, 즉 출석만 잘해도 금방 도드라집니다. 인사하기 좋고, 나누어 먹게 되고, 시간 내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재미가 쏠쏠한 크기의 지역입니다.


올해는 봄비가 제법 와서 고추, 토마토, 딸기가 풍년입니다. 그 중에서 딸기와 보리수는 쨈을 몇 번을 만들고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병이 생기면 버리지 않고 깨끗이 닦아 모아둡니다. 캐모마일 허브, 박하, 레몬밤, 장미차는 우리 가족이 다 먹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수확을 많이 합니다. 양귀비와 금계국, 유채씨도 채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이웃들과 지인들과 나누고 선물로도 보내게 되겠지요.

작은 텃밭을 가꾸고 씨앗을 채종하면서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 아이와의 몸놀림은 빼놓을 수 없는 고마운 시간입 니다. 집은 작고 살림도 소소하지만, 무엇인가를 정성껏 준비 해서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존재가 참 좋아 보이는 계절입니다.

 

봄에 새로 만든 퇴비장 덕분에 이번 가을에는 4년 동안 묶은 퇴비장을 열고 숙성된 퇴비를 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숙성시킨 오줌과 함께 내년 텃밭 농사에 쓸 생각을 하니 뿌듯합니다. 벌써 가을이 기다려집니다. 생활하는 리듬이 있는 이 곳은 우리 동네입니다. 집은 작아도 집과 집이 모인 마을은 큽니다.

 

 

정상오

건축가.

생활하는 장소를 만드는 ‘코비즈건축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직접 디자인하고 조성한 ‘들꽃피는마을’에서 동네식구들과 2012년부터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저서로는 건축가의 정원, 정원사의 건축(2016)이 있다.  www.cobe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