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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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우리들의 연극교실」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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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연극교실」 개강 첫날 우리들은 핸드폰 속에 저장된 옛 사진들을 꺼내 스크린에 띄워 놓고 각자의 화양연화를 이야기 했다.
누구는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학을 졸업하던 날의 감격을 이야기 했고 누구는 지금은 아내가 된 학창 시절 여학생과의 우연한 만남을 이야기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여고 동창과 40년만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모든 좋은 기억들은 어린 날 잃어버린 작은 구슬처럼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퇴적된 시간의 층을 들춰 우리가 불러내니 여전히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싱싱한 모습으로 살아나 연극교실 첫 만남의 시간을 찾아와 주었다.

그렇게 추억한다는 건 지난 시간이 남긴 마음 속 삶의 무늬에 훈김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두 번째 강의 시간엔 "새로이 마음사전"이란 걸 만들었다.  
"새로이 마음사전"은 주어진 단어를 우리들의 일상에서 느꼈던 어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괜찮다"의 사전적 정의는 '문제나 걱정이 되거나 꺼릴 것이 없다'는 뜻이나

우리는 '손톱을 너무 짧게 짤라 쓰리지만 이틀만 지나면 자라니까 괜찮다'는 식으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설레다'는 '여행을 떠나기 전'이 되고 '야속하다'는 '감기로 고생 중인데 남편이 톡 하나 보내고 무심히 넘겼을 때'가 되었다.

평범한 단어들을 우리의 일상의 경험 속에 대입시키자 훨씬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우리의 삶이 사전 속 정의처럼 박제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오감이 동원되는 물리적 현실이거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연극과는 상관없는 듯한 오락(?) 같은 즐거운 활동으로 총 6회의 강의 중 3분의 1이 지나갔다.

'뭐지?, 연극은 언제 하는 거지?' 하는 염려의 마음이 살짝 들 무렵 연극교실을 총괄하는 서하경 강사의 맞춤 설명이 있었다.
"여러분들이 말씀해주신 "화양연화"와 "새로이 마음사전"을 모티브로 하여 다음 주까지 연극 대본을 쓸 것입니다.

그리고 3번의 연습을 거쳐 강의 마지막 날 무대에 올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공연되는 것입니다."  
강사의 말은 연극교실에 참가한 동기 수강생 모두에게 파격으로 다가왔다.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는 웅성거렸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3번 만에 그러니까 겨우 6시간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더군다나 연극이라고 해 본 적이 없는 우리들이?"

 

거듭되는 물음표를 서하경 강사님이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가능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믿으세요. 앞선 1∼3기까지 총 6편의 연극도 그렇게 무대에 올랐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탁월한 배우이십니다.

이제까지 50+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거대한 연극무대 같은 사회 속에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데 탁월한 배우의 삶을 살아오지는 않으셨나요?

이제 잠자고 있는 내면 속 여러분의 열정을 이 기회에 마음껏 풀어내 보십시오. 그러면 연극은 저절로 됩니다."

 

 

 

 

 

일주일 후 우리들 앞에 거짓말처럼 연극 대본이 놓여졌다. 제목은 「기억」이었다.

대사 틈틈이 우리들이 발표한 "화양연화"와 "새로이 마음사전"이 들어가 있었다.

누구나 젊은 시절 한번쯤은 겪었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이야기, 아니 4기 연극교실 수강생들만의 이야기가 모아진 것이다.

 

두툼한 대본 집필에 분명 며칠 밤을 새웠을 신미정 강사님은 「기억」에 예쁜 의미를 입혀주었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낯익다 싶은 따끔거리는 기억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시절을 꺼내는 시간들은,

나였다가 나 일 것이었다가, 타자(他者)의 숨소리에 섞여 무대 위 이야기가 되었다“ 고.

 

그리고 연습이 이어졌다. 이제까지 관람자로서 무대를 바라보는 데만 익숙했던 우리들은

서하경 강사로부터 무대에서 필요한 새로운 기술과 노하우를 속성으로 배워야 했다.

 

'무대에선 생각보다 빨리 걸어라'. '걸을 때 잔걸음 치지 마라'. '거만한 자세로 걸어라'. '걸음으로 감정을 표현하라'.
무대에서 서있을 때 흔들거리지 마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버티고 서라. '숨을 너무 자주 쉬지 마라.' '감정은 호흡으로 전달하라.' '대사하는 사람을 쳐다보라.' 등등.

 

폭포수처럼 여러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졌지만 연습 분위기는 긴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로움 속에 진행되었다.

서하경 강사의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시라"는 주문을 우리는 각자 편한 대로 해석하여 너무 '진지해지는 것'을 피했다.

사실은 난생 처음 대하는 연극인지라 자신의 몸동작과 얼굴 표정이 어색하여 킥킥거리는 것이기도 했다.

배역 결정은 은근한 경쟁과 양보 속에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특정 배역을 맡고 싶은 이유는 저마다 여러 가지였다.

어떤 이는 춤을 추는 동작이 들어가서였고 어떤 이는 '내가 바로 연극 속 배역과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생처음 무대에 오르는 시간은 묵직한 부담감과 함께 다가왔다.

대사를 까먹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제일 컸다. 자신의 대사를 핸드폰 속에 저장하며 수시로 듣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장난기 섞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진지한 총연습을 거쳐 마침내 공연이 진행되었다.

역할에 몰입한 몇 명은 진짜 눈물을 흘리는 열연을 보이기도 했다.

입에서 술술 나오던 대사가 정작 무대 위에선 머릿속에서 하얗게 탈색되어 떠오르지 않는 곤혹의 시간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무대 아래선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마침내 연극이 끝났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에 놀랐고 스스로에 대견해 했다. 
"아 정말 이렇게도 연극이 되는구나! 3주 만에 대본을 만들고 연습을 하여 무대에 서다니!"

 

 

무대를 내려왔을 때 우리 모두는 연극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비록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 무대 같은 간이무대에서의 공연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해타산이 걸린 문제가 아닌 순수한 목적의 공동 작업에 우리가 이렇게 밀도 높게 몰입하고 매진해 본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서로를 축하했다.

당분간 세상엔 연극 무대에 서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두 종류의 사람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 2019년 가을 「우리들의 연극교실」 을 지도해 주신 강사님들.왼쪽으로부터 한지은님, 서하경님, 신미정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 화양연화"가 해묵은 과거의 전유물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 숨쉬는 한 언제나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기에 "화양연화"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또 미래가능형인 것이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설혹 팍팍한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날 지라도 누구에게나 이슬이 깔린 첫 새벽길 같은 전인미답의 화양연화는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혹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연극 무대에서처럼 그저 당당하게 걸어가면 된다. 길은 나서는 자에게만 열려있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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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의 시인 나짐 하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은 이럴 때 적절하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는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글 및 사진: 학습지원단 정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