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친구들과 울릉도에 갔는데 마침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가 있었다. 친구들과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배우 윤정희 씨 일행과 마주쳤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함께 봤던 우리는 반가워 인사를 하고 몇 마디씩 얘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니 안타깝고 슬프다. 기사 내용을 보면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것은 10년 전쯤이라 한다. 영화 '시'를 촬영했을 때와 울릉도에서 만났을 때도 병이 진행 중이었다는 거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0562

 

'시'에서 미자는 65세로 중풍노인 돌보는 일을 하며 외손자를 키우고 있다.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 수업을 받고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을 관찰하며 노트에 기록도 한다. 미자는 일상에서 흔히 쓰던 단어들을 자꾸 잊고, 손자 종욱은 동급생을 집단 성폭행해서 그 여학생이 강에 투신한다. 가해 학생 아빠들은 3천만원을 여학생 엄마에게 주고 합의하려고 하는데 미자도 5백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미자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손자와 합의금으로 죄를 덮어버리려고 하는 부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합의금을 마련해 전달했지만 손자를 형사에게 넘겨 준 후, 과제였던 시 한 편을 제출한 후 사라진다.

영화는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가 미자의 목소리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로 낭송되며 강줄기가 세차게 흐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아마도 그곳에서 여학생이 생을 마감했듯이 미자도 뛰어 내린 거 같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친구들과 나는 외손자의 죄 값을 치르는 문제에 대해 얘기를 했었다. 결론은 미자처럼 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그것이 손자를 위해서라도 옳다는 거였다. 또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그 역시 미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윤정희 씨의 근황을 듣고 다시 한 번 영화 '시'를 봤다.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미자는 왜 시를 쓰고 싶었을까? 미자의 현실은 녹녹치 않고 누추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이 있었다. 팍팍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영혼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업 중에 기뻤던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미자는 '어린 시절 언니가 예쁜 옷을 입혀주고 예쁘다' 했던 순간과 '나중에 시인이 되겠다' 얘기했던 선생님의 말을 회상했다. 그 장면에서 요즘 내가 치매안심센터나 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배우 윤정희 씨가 65세였을 화면 속 모습은 꽃무늬 블라우스에 하늘거리는 프릴스커트를 입고, 챙이 있는 모자와 레이스로 된 스카프를 하고 야들야들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젊은 시절 최고의 배우답게 예쁘다. 그런데 보통 배우들처럼 자글자글한 주름을 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더, 더 예쁘다, 아름답다.

 

안타까운 모습도 보인다. 그 당시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는 것 때문인지 윤정희 씨가 말을 할 때 입술이 또렷하게 움직이지 않고, ‘발음 모양으로 말하는 게 보였다. 계속 그렇게 말하면 얼굴 근육과 혀 근육이 점점 굳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래서 노인교구 수업으로 어르신들을 만날 때, ‘, , , , 입모양을 크게 하며 발음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만약 그때 윤정희 씨가 노인교구를 알고 수업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딸과 막내 여동생을 혼동하다가 지금은 딸도 몰라본다고 한다. 자기 안에서 나온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촬영시간은 언제냐고 묻는다고 한다.

치매가 시작됐거나 이미 많이 진행된 분들에게서도 정신이 아닌 몸이 기억하고 있는 행동들이 보인다. 그림을 전공했던 초로의 치매환자가 전시장에 그림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 모습을 봤다. 교구로 정교한 바느질을 하거나 균형을 잘 잡아 높은 탑을 쌓는 것을 보면 환자라고 느껴지지 않는 분도 있다. 온 마음을 다해 몸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뇌가 병들어도 그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점점 병이 더 깊어지면 자신조차 잊고 모든 것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자 하는 간절함에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김용택 시인의 얘기가 더해져 미자는 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가해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그 부모들이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미자는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죽은 소녀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됐을 것이다.

미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렸지만 정상인들 보다 옳은 판단을 했고, 자신과 주변을 정리했다.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 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 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 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아네스의 노래> 중 부분

 

 

미자가 썼던 시를 읽으며 나도 치매 환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당신들의 영혼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를, 덜 아프기를,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따뜻하게 나눌 수 있기를,

다른 세상에서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운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