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온통 봄이다.

 코로나19가 덮친 시간은 지루하고 불안하다. 봄은 저만큼 멀어지고, 여기저기 꽃들은 예년보다 더 화사하게 피고 진다. 반복되는 하루에 지쳐갈 무렵, 습관처럼 책을 들고 쪼그려 앉는다. 잠시 모든 걸 잊고 풍경을 더하고 추억을 보태어 이야기를 따라 길을 나선다.

 

  인왕산

 

 내 경우에는 책 속에 잘 아는 장소가 나오면 더욱 흥미를 느낀다.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도 그렇다. 나는 순전히 소설의 배경이 인왕산 언저리라는 이유만으로 동질감을 느끼며 몇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섬세한 시선을 가진 작가가 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을 다정하게 말해 주기도 하고,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주기도 한다.

 이 책은 그저 지나온 시간으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각각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그랬던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가보면 비극이라고’ 꼬질꼬질한 차림의 동구가 여동생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모습은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내게 낯익은 풍경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미움과 사랑, 갈등과 화해를 겪으며 인왕산 골짜기에 있던 조그맣고 초라한 집의 기억을 들춰낸다.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 안긴 씨앗처럼 봄을 머금은 이야기다.

 

우리 집은 인왕산 허리 부근, 얼마나 단단한지 사람들이 ‘땡돌’이라고 부르는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산줄기에 손바닥만 한 집들이 고물고물 기어 올라가 있는 조그만 달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 p.14

 

살아 있는 나뭇잎들과 한때 살았던 나뭇잎들은 함께 힘을 합쳐 매우 향긋한 공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곳을 감도는 바람은 단술처럼 맛있다. -p.17

 

 가파른 언덕길이 실핏줄처럼 이어지다 멈춘 곳. 마당 한 뼘 없는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윗동네는 차로 올라갈 수도 없는 골목이었다. 동구네 가족들이 살던 집이 거기 어디쯤 아니었을까. 크고 단단한 바위가 담장처럼 에워싼 집에는 온갖 나무들이 맑은 공기를 뿜어댔다. 동구네 집을 휘감아 돌던 바람에도 짙푸른 냄새가 배어났다.

 

  인왕산 범바위

 

 나는 인왕산 자락에서 운 좋게도 스무 해를 살았다.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다. 스치듯 놓쳐버린 추억이란 얼마나 애잔한가. 서울 생활에 길들여지지 못한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무서운 세상의 속도 앞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 날이면 인왕산을 날마다 오르내렸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적당하게 내 발걸음을 잡아 당겨주는 비탈길을 걸을 때마다 매사에 성급하게 굴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가벼운 풀씨 한 톨이 만리장천을 건너와 싹을 틔운다는 것을, 하늘과 땅의 기운 안에서 스스로 조련하고 힘을 발휘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봄이면 바위틈에 진달래가 무더기져 피어 분홍빛에 마음 설레고, 여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고, 가을은 비단 자락 풀어 놓은 산 풍경에 흐뭇하며, 담백한 산수화 같은 인왕산 설경은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소설 속 동구가 윗동네 삼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에 종일 머문 것도 늘 변치 않는 인왕산이 우뚝 서 있어 그랬을 것이다.

 

희부연 겨울 햇살이 안개처럼 정원을 두르고 있었다. 조심스레 정원으로 들어서자 나와 정원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처럼 감싸 돌았다. 이곳에 가져다 놓으면 뭐든지 다 아름다워지는 걸까? 잘 살펴보면 삼층집 정원이라고 해서 값비싼 고급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모퉁이에 흔해빠진 수수꽃다리도 있고, 전혀 쓸모없이 억세기만 해서 산에서 마구 뽑아버리는 아까시나무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흔한 것이건 귀한 것이건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에는 다 같이 한몫을 하고 있었다. 삼층집 정원의 아름다움은 추운 날씨나 하늘을 찢는 번개도 끄덕없이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것이지만 시멘트 한 줌, 어느 난폭한 손목의 돌팔매질 한 번이면 곧바로 상처 입을 수 있는 여리디여린 것이기도 했다. -p.346

 

  인왕산 윗 동네 집

 

 얼마 전, 인왕산 암반이 마당에 불쑥 솟아있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어린 동구가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삼층집은 아무리 돌아봐도 보이지 않았지만, 바위와 나무들은 그대로였다.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삼층집 정원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수수한 동구의 순수한 마음이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을 인왕산 자락의 풍경이다.

 

차가운 철문을 힘주어 당기며 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아름다운 정원, 황금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련다. -p.350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어린 소년의 눈을 빌려 동구네 가족의 일상과 산동네의 고만고만한 주변의 이야기를 세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나뭇가지에 연한 새잎들이 배냇니를 드러내며 아기 웃음처럼 툭툭, 움을 틔우고 있다. 얼어있던 계곡물이 다시 흐르고 겨울잠을 자던 날짐승, 길짐승도 기지개를 켜고, 먼 산에 연둣빛이 능선마다 피어오르며 싱싱한 물기로 숲이 깨어난다. 자꾸만 눈길이 닿는 인왕산에도 봄이 닿아 있다.

 

  인왕산 정상 풍경

 

 한때, 우리 모두는 ‘동구’였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그려지는 세계를 우리는 무심히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이렇게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에는 소설 속 ‘동구’를 따라나서자. 삼층집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겹겹의 봉우리에 구름 얹힌 초록의 인왕산에게 인사를 건네자.

안녕, 나의 아름다운 정원!

 

*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 제7회 한겨레문학상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