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포털 필진 이현신님이 지난 여행을 되돌아보며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전쟁이 나면 서울 사람들은 어디로 어떻게 피난을 가야 할까? 아무 데도 못 간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다. 8,135km2로 충청남도만 하다. 호수가 충청남도만 하다니! 하고 놀라겠지만 남미 대륙에서는 크기와 높이와 넓이의 개념이 다르다. 해발고도 3,810m로 배가 다니는 호수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담수호의 이름은 티티카카다. 페루와 볼리비아에 200만 명 정도 흩어져 사는 아이마라족은 전쟁이 나자 기발한 방법으로 온 마을을 들고 피난을 갔다. ‘토토라라는 갈대로 호수 위에 섬을 만들고, 인공섬 위에 집을 지어서 호수를 떠다녔다고 한다. 학교도 있고 운동장도 있고 관공서도 있다. 지금은 관광객에게 섬을 어떻게 만드는지, 집을 어떻게 짓는지 시연하고, 기념품을 팔고, 유람선을 태워 주며 생활한다.

 

뚝딱 만든 섬과 집(필자 앞)

 

바이킹 배를 닮은,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유람선도 갈대로 만든다. 모터를 단 근사한 유람선이 없는 건 아니나 관광객들은 갈대로 엮은 배를 선호한다. 유람선 뒤로 보이는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마을이다. 주택과 학교와 광장이 갈대 섬 위에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유람을 마치고 푸노로 돌아오면 재래식 시장에 들러보자. 좌판에서 수박, 바나나 같은 과일도 팔고 생수나 망고 주스도 판다. 어디서 가져오는지 몹시 시원하다. 시장 내에서 송어 튀김과 감자가 들어간 송어 수프로 요기를 한 다음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한 조각을 후식으로 먹으면 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갈대섬 위의 마을과 유람선

 

213일 푸노는 마침 축제 중이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밴드 공연이 열렸고 거리에서는 민속 의상 차림의 퍼레이드가 있었다. 2월부터 3월 초까지 남미 대륙 전역에서 축제가 열린다. 브라질의 삼바축제 기간도 2월 말 3월 초다. 남미 대륙을 여행하고 싶다면 2월에 떠나야 한다. 볼리비아는 수백 년에 걸쳐 자행된 스페인과 미국의 수탈 및 거듭된 쿠데타의 결과로 1인당 GDP99위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지만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하다. 문맹률이 높아서 투표용지에 꽃이나 동물 같은 이미지를 넣는다고 한다. 감자의 기원이 볼리비아 북부라는 말에 걸맞게 감자가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색도 다양하다. 어떤 식당에 가도 감자를 곁들여 주는데 몇 사람이 먹어도 될 만큼 푸짐하게 준다.

 

퍼레이드 중인 민속의상 차림의 아가씨들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는 코파카바나를 경유해야 하고, 코파카바나로 가려면 국경을 넘어야 한다. 페루와 볼리비아 두 나라 출입국 사무소가 붙어 있으므로 걸어서 간단하게 월경한다. 볼리비아 출입국 사무소의 모습이 소박하기 그지없다. 반드시 국경에서 현지 화폐로 환전하고 물도 사고 화장실도 가는 게 좋다. 미국 아랫동네이니 달러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카드 사용도 어렵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반미 정서가 더 깊어졌다고 한다. 코로나19 감염자와 사망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니 이 분야에서만큼은 공약을 달성한 셈이다. 얼마 전 흑인을 질식사시킨 경관 때문에 경찰서가 불타고 백악관이 폐쇄되기도 했다. 나라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으니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현찰을 들고 다녀야 하는 만큼 여행 기간 내내 소매치기나 도둑을 조심해야 한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볼리비아 출입국 사무소

 

아이마라족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2006년부터 2019년까지 볼리비아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다. 그는 체 게바라의 뜻을 잇겠다는 공약으로 원주민 출신으로 처음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케이블카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도입한 발상의 전환이다. 라파스는 해발고도 3,200m부터 4,100m에 걸쳐 형성된 도시다. 부자들이 사는 아래쪽은 도로가 널찍하고 직선이지만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의 골짜기 곳곳에 들어서 있는 마을 도로는 경사가 가파를 뿐만 아니라 폭이 좁아서 일방통행 길이 많다. 고지대에 사는 서민을 위한 케이블카는 우리나라 전철과 같은 역할을 한다. 20143개 노선 개통을 시작으로 지금은 8개 노선이 운행 중인데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긴 케이블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배기가스도 배출하지 않고 정체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서 서울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라파스의 케이블카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인 교통수단은 보지 못했다. 밤에는 케이블카에서 남의 집 방안이 들여다보인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모랄레스는 4선 연임을 위한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가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20191112일 멕시코로 망명했다.

 

라파스의 대중교통 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고 달의 계곡에 가 보자. 황량해서 달의 계곡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신기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무엇을 닮았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신기하게 생긴 바위. 엄청 크다.

 

저녁이 되면 구름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온다. 이삼십 분 만에 도시가 완전히 구름에 파묻히기 때문에 멋지고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시간은 아주 짧다. 구름이 슈우욱 내려와 케이블카를 감쌀 때 나는 천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명멸하는 달동네의 불빛이 애잔하다. 가혹한 환경을 극복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갈채를 보내자.

 

구름에 파묻히기 시작하는 초저녁의 라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