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국가인 조선의 임금은 백성과 국정 현안을 토론했을까. 왕이 일반 백성을 만나는 것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임금은 서민들과의 직접 소통을 원했다.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정치를 한 대표적인 곳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앞이다.

 

옥천교. 궁궐 앞에는 개울이 흐른다.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뤄 위엄의 공간을 길지로 만든다. 이 물길을 금천이라고 한다.

창경궁의 금천은 특히 옥천으로 불린다. 옥천 주변에는 앵두, 자두, 살구나무가 조화를 더한다. <출처: 이상주>

 

이곳에서 왕은 백성과 만났다.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곡식을 나눠주며 만났고, 백성의 삶을 직접 듣기 위해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나라의 정책 의견을 구하고자 만났다. 창경궁의 홍화문 앞은 왕과 백성 사이에 역사적인 100분 토론과 끝장 토론이 펼쳐졌던 조선판 아크로폴리스 광장인 셈이다.

 

홍화(弘化)는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정치를 상징한다. 조선의 군주인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백성과 함께 하는 대화 콘서트를 진행했다. 한 번은 100분 토론이었고, 한 번은 종일 진행된 끝장 토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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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문.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건축했다. <출처: 이상주>

 

영조는 26년(1750) 5월 19일 이곳에 백성 50여명을 초대했다. 한양 오부(五部)를 대표하는 서민과 하급군인들이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한 세금 정책 마련을 위한 모임”이라며 “기탄없이 속에 있는 말을 다하라”고 했다. 임금은 토의 내용으로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를 제시했다. 또 세금 폐단을 없앨 수 있는 정책 제안도 희망했다.

 

당시 논의되던 세금 종류에는 호포 결포와 함께 유포(遊布)와 구전(口錢)이 있었다. 호포는 양반 평민을 구분하지 않고 집마다 내는 세금이고, 결포는 토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차등하는 안이다. 유포는 세금을 내지 않는 양인 가정에서 징수하는 것이고, 구전은 성인 모두가 내는 인두세다. 영조는 이중에서 세원의 주요 원천인 호포와 결포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문정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인 곳이다.

옛 문헌에 휘녕전(徽寧殿)으로 기록된 곳이 문정전이다. 왼쪽 잔디가 있는 곳, 아니면 흙 마당에 뒤주가 설치됐을 것이다. <출처: 이상주>

 

재산이 적은 서민은 결포가 좋고, 재산이 많은 양반 지주는 호포가 유리하다. 그런데 서민 백성들에게서 뜻하지 않은 대답이 나온다. “호포제를 원합니다.” 귀를 의심한 영조는 “후회하지 않을 대답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몇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호포를 주장했다.

 

왜 백성들은 이해되지 않을 대답을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날 실록을 쓴 사관의 평에서 읽을 수 있다. “박문수가 먼저 사람을 시켜 백성들에게 말했다. 호포는 임금의 의중이다. 따라서 자기의 소견을 말하지 말고 호포로 대답하라.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숭문당.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다. 숭문당 현판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왕자 시절에 신변불안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던 영조는 임금이 된 뒤 이곳에서 많은 책을 보았다. <출처: 이상주>

 

호조판서 박문수는 임금이 만날 백성을 미리 접촉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임금의 질문에 대해 답할 내용을 알려줬다. 서민이 아닌 지주에게 유리한 답을 강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관은 “성군(聖君)이 있으나 나라를 모유(謨猷)하는 신하가 불성실했다. 통탄함을 견딜 수 없다”고 적었다.

 

토론과 대화를 마친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은 한 달 보름이 지난 1750년 7월 3일 이른 아침에는 홍화문 앞에서 3정승 등의 대신, 80여명의 성균관 유생, 다수의 일반 백성이 참여하는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전의 백성과의 만남이 100분 토론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이었던 데 비해 이날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난상토론으로 진행됐다.

 

 

함인정. 임금과 왕족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왕의 남자인 연산군의 공길이 공연을 했던 곳이다.

앞마당에서 예인들이 기예를 펼치고, 임금과 왕족은 이 함인정에서 감상을 했다. 함인정에는 사계를 노래하는 시가 부착돼 있다. <출처: 이상주>

 

임금은 “세금 문제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성균관 유생들에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영조는 직접 재상부터 유생 서민백성에게까지 모두 의견을 말하게 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도 주제인 호포와 결포에 대한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신하들은 임금의 건강을 염려해 토론회 중단을 요청했다.

 

통명전. 내전으로 왕실의 대비(大妃)들이 거주했던 공간이다. 통명전은 순조의 어필이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주변에 흉물을 묻어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이상주>

 

그러나 영조는 결론을 얻을 때까지 계속하는 끝장 토론을 지시했다. 별빛이 보일 때쯤 임금은 참여자들에게 호포 찬성은 남쪽, 결포 희망은 북쪽에 서도록 했다. 마치 골든벨과 같은 퀴즈 프로그램에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도 영조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5일 안에 좋은 방안을 찾으라”는 명령과 함께 결론이 나지 않은 끝장토론을 마쳤다.

 

<환경전> 중종이 숨을 거두기 전에 반정세력에 의해 생이별한 단경왕후 신씨를 마지막으로 만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는 세상에 폐비된 중전이 궁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고 기록돼 있다.

또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가 운명한 곳이다. <출처: 이상주>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경궁은 여느 궁궐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성종이 어머니와 할머니 등 대비들을 위한 공간으로 편리성을 염두에 두고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해가 뜨는 동쪽, 바로 이곳은 조선시대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정책을 토론한 직접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경춘전. 정조와 헌종이 태어나고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거처이기도 하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비극을 안 뒤 할머니 인수대비를 증오한다. 경춘전에 머무는 할머니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로 앞의 함인정에서 흥청망청의 연회를 연다.

할머니의 가슴을 태운 것이다. <출처: 이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