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에세이] 여름날 연꽃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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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보러 시흥에 있는 관곡지를 찾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흥연꽃테마파크에 간 거죠. 비가 온다고 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잠시라도 내리지 않는 비속에서 연꽃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기예보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내린다고 했는데 아침에 내리고 그쳤어요! 비가 계속 내릴 줄 알고 종종거리며 열심히 빗속을 뛰어다녔는데 내가 그 수고를 다 하고 나자 비가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좀 억울하고(?) 많이 힘이 들었어요. 하지만 빗속의 꽃을 만난 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도 연꽃을 보러온 시민들이 참 많았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도 무척 많은 사람이 연밭을 찾았더군요. 다들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겠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들어 보여 주신 꽃이 바로 연꽃이었다지요. 거기 연꽃만 있었던 걸까요? 많은 꽃 가운데서 연꽃을 들어 보여 주신 걸까요? 꽃과 깨달음 사이에서 의미를 몰라 헤매는 제자들 가운데 가섭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지요. 부처님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겁니다. 불교의 화두 가운데 하나인 ‘염화시중’이 이 그윽한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말이 없어도 전해질 수 있는 진리란 어떤 세계일까요. 연꽃을 바라보며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막 피어나는 연꽃을 보며 염화시중이란 어떤 세계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햇빛 아래 고고한 자태인 연꽃도 멋지지만 빗속에 적나라한 풍경인 연밭도 무척이나 좋았어요. 몸이 지쳐갔지만 마음은 자꾸 푸릇해졌어요. 피었다가 지고 있는 꽃들조차 최선을 다해 제 몫의 생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참 대견하고 예뻤습니다.

 

사진3_비바람을 맞아 산발한 연꽃

 

키 큰 연꽃들 사이에서 수련은 옹기종기 화엄 세상을 보여줍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어여쁜 꽃이지만 여럿이 어우러져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반짝입니다.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풍경은 늘 감동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뚝 떨어져 혼자 존재하는 것은 무엇도 없다는 생각은 위로가 됩니다. 비록 지금 내가 외롭더라도요.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울고 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울고 있다…….”

 

릴케가 ‘엄숙한 시간’에서 쓴 그 시간도, 누군가 어느 곳에서 울고 웃고 걷고 있는 모든 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였겠죠. 이런 생각 앞에선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관계가 있다는 것은요. 우리가 서로에게 어린왕자의 장미일 수 있다는 것은요.

 

키 작은 수련들이 옹기종기 모여 핀 풍경은 화엄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비가 쏟아지는 연밭에서 커다란 초록 연잎들을 바라봅니다. 우물처럼 깊은 연잎에 빗물이 담깁니다. 웅덩이 같은 연잎이 물을 쏟아냅니다. 연잎이 다시 비었습니다. 채우지 않고, 담고 있지 않고 한없이 비우는 연잎이 지혜를 설법합니다. 법정 스님도 ‘연잎의 지혜’에서 "사람들은 가질 줄만 알지 비울 줄은 모른다. 삶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놓아버려야 할 것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연잎처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지요.

 

표면에 미세한 돌기가 있어서 물에 젖지 않고 튕겨내는 연잎 효과는 방수용품에도 활용되고 있다.

 

연잎에 고였던 물은 표면의 먼지까지 씻으며 떨어져서 늘 깨끗한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 마음 안에 고이는 슬픔과 불만과 두려움 같은 감정들도 한 번씩 다 씻겨져, 깨끗하게 빈 연잎 같으면 좋겠습니다. 연꽃은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뜰 무렵 피어나기 시작해 오전 열 시쯤에 절정이 되었다가 정오를 지나며 서서히 오므리기 시작한답니다. 그렇게 사나흘을 반복하다가 꽃잎을 하나둘 투둑투둑 떨어뜨리죠. 그리고는 뜨거운 햇빛에 씨를 만듭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연밭은 피는 꽃과 지는 꽃들이 어떤 흐름을 보여줍니다. 생과 사, 번성과 쇠락, 탄생과 소멸을요.

 

마침내 하나의 꽃잎만 남아 있는 연꽃. 이제 뜨거운 햇빛에 씨를 만들 시간이다.

 

모든 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연꽃은 지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연꽃은 꽃이 졌다고 아쉬울 게 없습니다. 연근과 연밥은 종종 우리 식탁에 오르고, 연잎과 꽃잎은 한여름 열기를 달래는 고아한 차로 만날 수 있죠. 꽃대와 줄기 또한 약재로 쓰인다고 하더군요.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이 식물은 우리 일상에 늘 함께하죠.

 

수련의 탄생

 

넓은 연밭 한쪽에 있는 관곡지가 8월부터는 문을 엽니다. 석축 보수공사 등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개방한다고 합니다. 강희맹이 명나라에서 연꽃 씨를 가져와 처음으로 꾸민 이 연못은 사각의 못에 둥근 섬이 들어앉은 방지원도 형태로 전통적인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죠. 어쩌면 강희맹이 이 연못을 바라보며 썼을 시를 생각합니다.

 

저 담 너머에 강희맹의 연못 관곡지가 있다.

 

“강 속의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물결 따라 달그림자 조각조각 일렁이네. 아니,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팔을 뻗어 달 조각을 만져보려 하였네. 물에 비친 달은 본디 비어있는 달이라, 우습다. 너는 지금 헛것을 보는 거야 …….”

 

때로 ‘강 속의 달’ 때문에 흔들흔들할 때 연꽃을 보러 다시 가야겠습니다. 자주 봐야 꽃들의 말을 더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무뎌지고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만나면 다시 그 말을 기억하게 되니까요. 연꽃은 8월 내내 핍니다. 피었다가 지는 꽃들도 있고 또다시 탄생하는 꽃들도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 조계사에서는 9월까지 연꽃축제도 이어진답니다. 코로나19로 먼 여행도 어려운 이 여름, 고요해져야만 느낄 수 있는 연꽃 향기로 마음의 열기와 번잡을 달래보지 않으실래요?

 

 

 

 

 

 

[글/사진 : 50+시민기자단 이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