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은 강학 장소다. 같은 경내에 공자 등 유교의 성현을 모신 사당인 문묘가 있다. 그렇기에 문화재로서의 이름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이다.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성균관로 31번지에 있는 성균관은 찾기도 쉽다. 수도권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서 10분을 걸으면 된다. 또는 3호선 안국역이나 종각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타도 된다. 많은 사람은 성균관에서 정치와 사상 인물 등의 흔적을 찾고,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성균관 전경. 성균관은 제의(祭儀)와 교육(敎育) 2개의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기관이었다.

앞 편에 제의가 이루어지는 대성전과 부속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뒷편에 명륜당과 교육관련 부속건물들이 있다. <출처: 성균관>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이끈 주역의 절대다수가 성균관 출신이다. 성균관에서 추구한 가치관은 이름에 담겨있다. 성(成)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均)은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의 첫 글자다.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서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유생들은 오랜 공부를 했다. 인격 함양을 위한 엄격한 생활 태도와 학문 연마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했다. 성균관 졸업은 고시인 문과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성균관 유생은 150명에서 200명 사이였다. 이들은 수재 소리를 들었으나 인격적으로 완성된 성인(聖人)은 아니었다. 공부하는 수험생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이들은 일탈 행위도 심심찮게 보였다. 승려와의 패싸움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집단 이기심, 정욕을 참지 못한 사적 이기심 등 다양하다.

 


석전대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출처: 성균관>

 

그렇기에 성균관 탐방 때는 고고한 인격체나 학문적으로 완성된 인물, 영향력 높은 고관의 흔적을 찾는 것과 함께 일탈한 유생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고아한 인품의 선비도, 성 스캔들을 일으킨 유생도 모두 성균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균관의 영향력은 수백 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성균관은 인간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얼굴의 성균관 유생을 통해 인간을 생각해 본다.

세종 때의 유생 최한경은 성균관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고지식할 정도로 바른 생활을 하고, 근엄한 삶을 살았을 듯한 그는 달콤하고 섬세한 사랑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랫말은 50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연인들의 귓가에 감미롭게 맴돈다. 그가 쓴 아름다운 사랑의 시 내용을 1990년대에 정훈희가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부르고, 조관우가 신비로운 목소리로 리메이크하여 세상에 물결치게 하였다.

 


향관청. 문묘 제사 때에 제관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
(하략)

 

이 노랫말을 최한경의 반중일기(泮中日記)에서 찾을 수 있다. 생원 시험에 입격한 최한경은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는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옆으로 돌린다. 성균관 주변의 반촌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꽃 속으로 한 발 두 발 떼던 최한경은 고향에 있는 정인(情人) 박소저를 떠올린다. 꽃 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며 붓을 휘갈긴다.

 

좌중화원(坐中花園) 첨파요업(瞻波夭嶪) 혜혜미색(兮兮美色) 운하래의(云河來矣) 작작기화(灼灼基花) 하피의(河彼矣) 사우길일(斯于吉日) 군자지래(君子之來) 운하지락(云何之樂) 와피동산(臥彼東山) 망기천(望基千) 명혜청혜(明兮靑兮) 운하래의(云河來矣) 유청영호(維靑盈昊) 하피람의(河彼藍昊) 길일우사(吉日于斯) 사우길일(斯于吉日) 군자지래(君子之來) 미인지귀(美人之歸) 운하지희(云何之喜).

 

최한경이 시를 쓴 때는 세종 26년(1444) 이전이다. 최한경은 세종 26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에 급제하면 행정 부처에 현직으로 임용되거나 수습을 밟게 된다. 성균관에서의 학습이 끝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작사자인 그는 성 스캔들의 불명예도 갖고 있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문묘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와 그의 종사자를 봉인한 본전이다. <출처: 성균관>


세종실록 20년(1438) 8월 1일 기사에 그가 등장한다. 어린 유부녀를 희롱한 죄로 장형 80대를 맞았다는 내용이다. 사건은 성균관 석전제(釋奠祭) 제관으로 선발되면서 비롯됐다.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인 석전제는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지극히 엄숙하게 진행된다. 제관은 주로 품계 높은 학자가 맡는다. 때로는 성균관 유생도 참여한다. 누가 제관이 되든 재계(齋戒)에 극히 신경 쓴다. 제사를 모시기 전에 제관은 목욕재계를 한다.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는 행위다. 

최한경은 반촌을 감싸는 냇가를 찾았다. 그는 동료 정신석과 시원한 개울물에 몸을 맡겼다. 마침 편복 차림의 앳된 여인이 여종 둘을 거느리고 개울을 건너고 있었다. 최한경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왕성한 반면 절제력은 약했던 듯하다. 

최한경은 물속에서 갑자기 뛰어나가 앳된 여성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황당한 상황에 여인은 완강히 항거했고, 그녀의 계집종은 "우리집 안주인"이라고 큰소리치며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정신석이 두 여종을 구타해 쫓아버렸고, 최한경은 여인을 힘으로 억누르며 입자(笠)를 빼앗았다.

두 계집종은 집에 급히 알렸고, 사내종이 현장으로 황급하게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밤이 되고, 최한경은 성균관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사내종은 성균관 직숙관에서 신고했다. “저는 홍여강의 종입니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주인이 반촌의 개울을 지나갈 때 두 유생이 강제로 옷을 벗겼습니다.”

숙직관은 유생들에게 확인했다. 두 사람은 “다만 희롱했을 뿐”이라고 반 자백을 했다. 사건을 담당한 사헌부에서는 강간 미수로 기소했고, 최한경은 성희롱이라고 주장했다. 당국은 사건을 성희롱으로 결론짓고,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벌을 주었다. 또 정진석은 장 40대로 처벌했다.

최한경은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썼다. 반면 유생 신분,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제관 신분으로 길 가던 여인을 추행했다. 반전의 두 모습은 인간 누구에게나 보일 수도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도 물려받은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두 면이 다 잠재하기 때문이다. 성균관은 악에서 멀어지고 선에 가까워지려고 공부하는 수련장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내가 앉은 바로 이 자리라고 했다. 지구가 둥글고 땅이 사방으로 평평하니 하늘 아래 내가 있는 자리보다 높은 곳이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같은 진리를 모르고 이웃나라 곤륜산 등에 올라가 더 높은 곳을 찾는다고 비판한다.

정약용의 생각은 나의 시각,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 맹목적인 이상향에 대한 경계로 볼 수도 있다. 깊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높지도, 낮지도 않게 보는 철학자의 식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계절은 가을의 길목이다. 성균관에서 무엇을 볼까. 한 번쯤 선비의 두 모습을 보면서 나, 너,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면 어떨까. 

 


성균관과 문묘. 문치주의 나라인 조선의 역사는 성균관 문묘 역사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