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선수 마이크 타이슨은 링 위에서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바람에 ‘핵 이빨’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돌적인 경기운영으로 인기를 모았는데, 은퇴 뒤에 더 화제가 된 것은 그의 솔직한 입담이었다. 경기를 왜 그렇게 풀어나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재치 넘치는 비유로 이렇게 응수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어요, 링에 올라가 얼굴에 펀치를 얻어맞기 전까지는 말이죠.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face)"

 

타이슨의 이 어록은 우리 인생전반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직장이라는 안전보호막을 넘어야 하는 50+세대에게는 더 공감되는 말이다. 직장 문을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나 나름의 계획이 있다. 하지만 막상 거친 들판에 홀로 서면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절감한다. 당황과 실망 속에 허둥대다가 엉뚱한 실수를 거듭하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혼미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을 되돌아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페르소나, 진정한 얼굴은 어떤 것인가? 인생의 주인공인 줄 알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고 조연, 더 나아가 단역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각 혹은 자학을 하게 된다. 이때쯤 앞서 세상을 살다간 선배들의 지혜의 말씀이 슬슬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란 시도 그 중의 하나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그렇다. 인생은 여행이다. 특히 직장 이후의 2막, 혹은 3막 인생은 여행과 유사점이 많다. 그 가운데서 어떤 삶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의 차이다. 직장생활이 패키지여행이라 한다면 2막 이후의 인생은 자유여행에 비유할 수 있다. 패키지여행은 항공권, 호텔, 식당, 일정 같은 대부분의 것들을 여행사와 가이드가 대행해주고 여행자는 몸만 따라가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하라는 것만 하면 된다. 반면 개인여행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자유로운 대신 디테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 해결하려면 예상치 않은 비용도 발생한다.

 

두 번째, 경력이 곧 실력이 아니다. 이제부터 여행의 규칙과 패턴에 차이가 생긴다. 패키지여행은 여행기간 내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 똑같은 사람들과 옆자리에 앉아 식사하고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편안하고 순조로운 여행을 원한다면 당연히 패키지 여행이 낫다. 다만 그곳에서는 단체행동의 규칙을 따라야 하고 독자적 행동은 최소한으로 규제된다. 반면 자유여행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바뀐다. 다채로운 대신 매일 새로움에 적응해야 한다. 패키지여행 오래했다고 자유여행을 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마찬가지다. 직장생활 오래했다고 곧 실력으로 연결되는 법은 없다. 경력을 실력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그 적응능력이 관건이다.
 

세 번째,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항공기는 엔진을 최대한 가동시킨다. 비행기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이륙과 착륙순간이기에 일정한 고도에 도달해 기류를 탈 때까지 굉음을 올리면 최대한 속력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추락한다. 2막 인생도 마찬가지다.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1년 이상 사전준비를 하고 3년 이상 미친 듯이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정궤도에 진입했다고 장담하기 이르다. 비법은 없다.
 

네 번째, 여행이란 뜻밖의 상황과 낯선 것들의 연속이다. 가끔 항공기 출발이 지연되고, 연결편이 결항되거나 비행기 옆자리에 원치 않는 승객과 동행해야 한다. 예약한 숙소가 홍보자료와 달리 엉망인 경우도 없지 않다. 렌터카의 네비게이션이 이상한 곳으로 안내해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길을 잃어보아야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 비로소 나의 능력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생기며 진정한 나를 알게 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나는 것이다. 문제해결능력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다섯 번째, 그 동안의 직장인은 탄탄한 육지여행이라면 2막 인생은 바다여행과 비슷하다. 퇴직 이후의 세상은 바다와 같아서 가끔은 파도와 풍랑을 만나기도 한다. 흔들리는 바다여행은 균형이 관건이다. 뱃사람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직장생활이 안정되고 고정된 기반 위에서 일했다면, 퇴직 이후는 안정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돌아보면 세상은 원래부터 흔들거리고 움직였다. 그것이 자연의 본질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음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는 육지의 다리가 아닌 뱃사람의 다리 감각에 적응해야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 가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나의 ‘지식냉장고’를 다시 열어보는 작업이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식품이 오래되면 상하고 부패하여 몸에 해가 되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지식냉장고 안에 축적된 것들이 얼마나 낡고 시대에 뒤떨어졌는지 뒤돌아 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래 전의 히트곡 한두 곡으로 무대에 서는 가수가 처연해 보이듯, 30년 전에 배운 지식으로 세상을 말하는 사람 또한 그렇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지식은 과감히 탈脫학습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와 기술, 경험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맞는 무형자산이다. 
이제는 성공이 아닌 성장으로 인생의 프레임을 바꿔줘야 한다. 성공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성장까지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육체적 성장은 멈췄어도 정신과 영혼은 얼마든지 더 풍성해지고 강해진다. 여기서 ‘강하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거칠고 사납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다움’을 유지하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매력적인 인생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나 두렵다. 최소한 유쾌하지 않다. 그렇다고 ‘빈티’나 보일 필요는 없다. 마음 먹기 따라서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빈티지 인생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곧 명품인생 아닐까?  


"새로운 인생 여행을 시작하는 50+세대는 디지털 시대 속에서 그동안 쌓아온 지식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자기다운 인생의 좌표를 통해 길을 나서야 한다."

 

 

* 손관승(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이며, 한류 플랫폼 기업인 iMBC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세한대학 교수와 중앙대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현재 조선비즈에 ‘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을 연재중인 작가다. ‘투아레그직장인 학교’,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노마드’, ‘괴테와 함께한이탈리아여행’ 등 많은 책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