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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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이 바다로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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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올해의 마지막 달이다. 너무도 빨랐던 1년, 그림자로 존재한 것 같아 그 안을 들여다본다. 빛이 차단되었던, 그러나 그만큼의 어둠을 경험하면서 빛의 소중함을 감각했던 시간이어서 앞으로의 시선은 조금 넓어지고 입체적이기를 희망하는 중이다.

 

 대체로 우리는 어려운 일에 부딪히거나 불편함을 느낄 때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괴롭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은 스트레스에 압도돼 움직일 여력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지만, 과하지만 않다면 약간의 스트레스는 생기를 주는 긴장감이 될 수 있다.

 

 

 

 

 

 

 올해는 ‘가장’이란 말을 자주 실감한 해가 될 듯하다. 가장 외출이 뜸했고, 가장 한적한 생활을 했고, 가장 전자 환경에 많이 노출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전자 환경은 앞으로 한층 가속화하리라. 코로나19가 한 해를 점령하다시피 했고, 11월 중순 또다시 단계가 격상한 상황에서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기대는 불가능해졌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BC와 AC로 표현될 만큼, 강력한 이 바이러스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 올 들어 시행된 다양한 비대면 모임은 정보사회의 단면이 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SF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잠깐이면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일상적’ 일정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아가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사이, 이제는 대면 접촉 대신 비대면 방식을 일부러 선택하는 일도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지난 5월부터 50+시민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필자는 중층의 변화를 경험했다. 정기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 집중할 부분을 향해 마음의 촉수가 늘어났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일상적 관찰, 복잡한(?) 생각의 정리, 실제와 상상을 통한 인식의 지평 넓히기 등과 맞닿아 있다. 이 모두가 글쓰기 아닌 일로도 가능하지만, 글쓰기는 반드시 위 상황을 결과로 낳는다. 동시에, 글쓰기는 스스로 선택한 언어를 건축물처럼 형상화하는 일이어서 머리와 손이 조응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커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만들어가는, 자기를 비워가면서 결과물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인 일이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행동이 되풀이되면 저절로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기억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도 많다. 필자는 시민기자단의 글쓰기를 통해 또 다른 글쓰기를 시작했다. 수많은 행동과 상황이 늘 의미를 갖기 어렵고, 많다 보면 자꾸 잊히고, 나중에는 스스로 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늘어나면 다른 방식이 필요해진다. (언제인지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숫자로 많은 게 중요하지 않다. 양보다 질이 우선되는 순간, 성장보다는 유지에 방점이 찍힌다. 이미 충분하니 선별할 일이 필요해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필터링이 없다면 같은 일인 줄도 모르고 되풀이해서 헛삽질 하는 일이 많아질 테니까.

 

 부질없는 되풀이,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느라 에너지를 쓰는 대신, 기억될 행동으로 일상을 구축하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것이 없어 보인다. 50+시민기자로 각성이 된 필자는 밤낮이 있듯이, 앞뒤가 있듯이 서로 붙어 있어야만 인식되는 개념이라던가, 그런 방식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 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는 니체의 말은 필자에게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고, 글로 쓴 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촉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어떤 반복을 하느냐에 따라 일상적 시공간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글 쓰는 데 필요한 관점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 좀 더 보편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이 상상되고,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도 한다. 핵심은 (자기다운) 고유성을 드러내는 관점을 유지하되, 다양한 사안/행동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하면서 기억하거나, 기억하려고 행동하거나. 어느 쪽이든 비율과 순서만 다를 뿐, 우리의 공통된 양상인 듯하다. 야행성-주행성, 내향적-외향적, 혹은 문명-자연 등 대립되는 한 쌍이 긴장 속에서 균형을 잡듯이, 우리는 저마다의 대립 쌍을 통해 다른 타이밍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호소일 수도, 정언명령 같은 양심의 소리일 수도 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혼자 잘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함께 잘 살려는 마음만으로도 주변이 밝아진다. 숨어 있어 몰랐던 우리 안의 빛 때문이다.

 

 BC와 AC로 달라진 것들은 우리 안을 어떻게 비췄을까? 필자에게 2020년 코로나19를 겪는 현재는 그 층이 한 겹 늘어난 현실이다. 그 현실을 글로 기억하고 재확인함으로써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시선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사유체계가 넓어진다. 이것 대신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사이의 선택, 이것과 저것 간 조합, 이것과 저것의 비율 조정 등 방식도 다양해진다. 사실, 바뀐 현상 하나에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은 언제나 단색일지 모른다. 갖가지 빛깔을 기억해야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래야 그 시선이 바깥으로도 이어진다. 내 안에 없는 건 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렇기에 상대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법이다.

 

 

 

 

 

 

 나와 상대는 (무의식적으로라도) 힘의 관계로 여기에 존재한다. 상대가 있어 내가 있기에, 경쟁한다는 미명 아래 상대를 죽이는 건 궁극적으로 나를 죽이는 일과도 같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같은 환경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소모적인 경쟁이 없어지고, 개별자의 인식 능력도 좋아진다. 심해여도 파도는 출렁인다. 둘은 하나의 다른 현상일 뿐…. 이 순간, 안치환이 노래로 부른 류시화의 시 ‘소금인형’이 바다로 들어간 이유가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