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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올려 본 하늘이 너무 좋아서 외출을 준비하고 나섰다. 마스크 안으로 가려진 얼굴이라 선크림 하나만 바르고 나왔는데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이런 날은 실내보다는 햇빛 따듯한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거리라면, 종로길이다. 첫눈이 오면 첫눈이 온다고 약속을 잡고, 명절이면 용돈 받아 나온 곳이 종로였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약속 장소였다. 약속이 생기면 버스를 타고 종로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렘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나 명절 때면 극장이 모여 있는 종로에는 개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거리 가판대에서는 언제나 가장 인기 있는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그저 걷기만 해도 즐거운 거리였다.

 

나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던 종로가 가끔 그리워진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인사동 길을 지나 종각까지 걸어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햄버거집 2층 창가에서 바라보던 종로 길이 생각난다. 종로는 대형서점도 있고, 큰 절도 있고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참 많은 곳이었다. 종로는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곳이고 게다가 결혼 전까지 다닌 회사가 있던 인사동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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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역을 나오면, 종로서적이었던 건물 뒤에 자주 가던 작은 국숫집이 있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아쉽게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인사동이다. 인사동은 종로 2가와 종로 3가 사이에 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길이다. 역에서 나와 20미터 정도 직진을 하면 추억의 햄버거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라지고 다른 것이 들어오려고 하는지 공사 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종로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없어진 간판이 아쉬웠다. 그나마 인사동 길로 건너는 건널목 앞에는 아직도 추억의 치킨집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있었으니 정말 오래된 곳인데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길을 건너 탑골공원 사잇길로 직진을 하면 인사동길이 나타난다. 오랜만에 들린 인사동길은 마침 사람들이 적어 한산했다. 결혼 전 몇 년 동안 다니던 회사가 있던 곳, 보이는 건물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점심시간이면 우르르 줄 서서 먹던 만두집도 생각이 났다. 골목 사이사이 맛집들이 지금도 많다. 회사가 인사동이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퇴근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 작품이고 좋은 풍경었다.

 

조금 걷다 보니 눈에 익은 전통찻집이 보였다. 비라도 내렸으면 보약 같은 쌍화차 한잔을 마시고 싶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쌍화차에 노른자 띄운 것이 그렇게 맛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얼음 가득 담긴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더 좋았다. 인사동에 나온 김에 작은 부채라도 사야지 싶어 전통가게에 들어갔다. 알록달록한 천연원단에 아름다운 수가 놓인 마스크도 많았다. 나는 보라색 천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분홍 술이 달려있는 부채를 하나 사서 나왔다. 슬슬 걸어가는 시간은 뜨거운 햇살에 더 느릿느릿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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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붓들이 가득한 오래된 화방 앞에서 한참 붓 구경을 하다가 할인하는 붓과 민화책 한 권을 샀다. 오래전부터 민화를 배워야지 싶었는데 배울 기회를 놓쳤다. 늘 독학이 편했던 나였지만 민화는 학원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는데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미뤘었다. 민화 물감은 집에 있으니 붓만 다시 사면되었다.

 

그냥 해보기로 했다.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시작해보면 조금씩 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분명하다. 민화에는 소원성취의 힘이 있다고 한다. 진흙 속에서 피어났지만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나 연밥을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그려볼 생각이다. 머리 위로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도 신나는 일을 한 봉지 담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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