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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서)

 

마음에 바람 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고백하자면, 더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 변명하자면 나이가 들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몸에 생채기 많았고 옹이 깊었어. 켜켜이 덧댄 나이테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연을 품고 있을지. 뿌리가 지옥까지 뻗어 내려가야만 천국으로 나뭇가지를 드리울 수 있다는데, 나무는 얼마나 자주 지옥과 천국을 오갔을까?

 

호시절엔 넉넉한 그늘 아래 많은 생명이 머물렀을 거야. 짧게는 한 생애를, 길게는 한 고장의부침과 영광을오롯이지켜도 봤을 거야. 모정에 사람들 넘쳐날 때면 그 아래에서 잔치가 열리고 술판도 벌어지고 개구쟁이 아이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재롱도 부렸겠지. 지성으로 모시는 마을 어르신 덕에 낮부터 막걸리깨나 마시기도 했을 거야. 취기 오른 어느 야심한 밤에는 동네 사람들 피해 온 갑돌이와 갑순이의 수작질을 모른 척 숨겨 주기도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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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한철, 세월이 무색하게 젊은이 떠나 한 집 두 집 비어갈 때, 아이들 웃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 이따금 꼬리를 흔들며 지나던 견공들마저 땅에 묻혀 영영찾지 않을 때, 나무는 외로웠겠다. 더러 바람이 머물고 날짐승 깃들었겠지만 그래도 많이 외로웠겠다. 한곳에 붙박이처럼 있어야 하는 생이 서럽기도 했겠네. 좋아하는 이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싫어하는 이를 내칠 수도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견디고 견디고.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삶이라니, 잠시의 떠남도 허락되지 않는 생이라니!

 

모진 사연에 무참히 꺾이기도 했을 거야. 자식 앞세운 어미로부터 오입쟁이 서방에 지친 마눌님, 자식 못 낳아 시집살이 서러운 며늘아기가 흘린 눈물로 뿌리 마를 날 없을 때, 나무는 고단했겠네. 심하게 절망한 이가 전하지 못할 마지막 유언을남긴 채목맸을 때면 가지 하나 마음대로 부러뜨릴 수 없는자신의 처지가원망스러웠겠다. 그런 날엔 가슴팍에 옹이 서너 개 박혔을 테고, 몇몇 나무는 애먼 화풀이 대상이 되어 날 선 도끼에 넘어지거나불쏘시개가 되기도 했겠지. 그렇게 모진 풍파 용케 견뎌내고도 결국 절명한 고사목들, 베어진 나무 밑동 아래에 서면 어쩐지 가슴이 시려 진설이라도 올리고 싶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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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나무 이파리가 흔들려. 바람이 지나는 거겠지. 그러면 나는 또 바라게 돼. 한결같이 한 자리에 서있는 나무 말고 언제든 어디든 자유롭게 훌훌 떠날 수 있는 바람이면 좋겠다고. 흔적 없이 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고 싶다고.

 

알고 있어.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해. 명백한 오독인 거지. 바람은 정처 없는 게 싫을지 몰라. 한곳에서 한결같고 싶을지 몰라. 무게가 없어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한없이 가벼운 자신의 존재가 한탄스러울지도 몰라. 이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내 감상일 뿐, 그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저답게, 몹시도 저답게 충실할 뿐이야. 그걸 알면서도 잠시 꿈을 꾸고 싶은 거지. 어딘지는 몰라도 나무 같은 혹은 바람 같은 생이 있어 내 생이 생기가 돌고 지탱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스스로를 위무하고 싶어서

 

분명한 것은 살아온 지난날들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남은 날들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거지. 물론 살다 보면 내 안에 똬리 튼 어린아이 하나 어쩌지 못해 쩔쩔매기도 하고, 되는 일 하나 없는 운 사나운 날이 닥치기도 할 거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무와 바람이 들려줄 거야.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 하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 하나쯤 껴안고 살아간다고, 모두가 제 무게를 견디며 보이는 것과 그 이면의 삶을 동시에 살아낸다고.

 

끝끝내 괜찮아지지 않는 날이면, 다만 기도할게. 내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유난 떨지 않고 상처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이유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기를. 내 삶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더불어 주변의 삶을 응원하면서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줄 수 있기를,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깊어질 수 있기를.

 

50+에세이작가단 우윤정(abaxi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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