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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어오는 저 열차!!

여기서 뛰어가도 못 탑니다. 제가 해봤어요.]

 

하행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오른쪽 벽면에 보이는 문구였다. 천천히 가라고, 어차피 뛰어 내려가도 사고의 위험만 있을 뿐이니 뛰어 내려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출퇴근길에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다녔으면 이 재미난 문구가 붙었을까. 위험하니 뛰지 말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 걱정스러운 누군가의 묘안이었을 텐데 볼 때마다 뛰려는 마음을 잡아준다.

 

제가 해봤어요. 이 말이 '그렇구나. 뛰어봤자야, 탈 수 없다잖아' 라며 뛰어 내려가는 발걸음에 제동을 건다. 참 이상한 것은 급행 방향에서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뛰다 보면 나도 뛰어야 할 것 같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뛰는 사람 옆에 천천히 걷고 있으면 왠지 멋쩍을 때도 있다. 하행하는 몇 분 동안 사람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본다. 나 역시도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이 없는 우리는 분명 조바심이 나서 다시 핸드폰을 보게 되겠지만 잠깐의 몇 분쯤은 생각의 휴식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느 역에서 시험해보니 정상적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때 227, 전력질주를 하면 16초가 걸리지만 대부분은 열차를 놓치고 사고 위험까지 있다고 한다. 뛰어 내려가도 탈 수 없다는 말은 늦은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뛰었을 걸 하는 마음도 가볍게 해 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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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9호선 급행에서는 오는 시간을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다. 타기만 하면 어지간해서는 늦을 일이 없어서이다. 집 앞 지하철역은 일반행이 먼저 도착해도 출발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 아침시간에는 여의도까지 급행보다 먼저 가는 일반행이 있는 곳이다. 나 역시 계단을 내려가면 순간 고민을 한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급행을 타고 갈까, 빈자리가 많은 일반행을 타고 천천히 갈까, 보통은 일반행을 타고 앉아서 갈 때가 많다. 늦었을 때야 줄을 서서라도 급행을 타겠지만 약속시간보다 미리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행을 타고 앉아가고 싶어진다.

 

다만 이역은 일반행이 급행을 먼저 보내주어야 한다고 방송이 나오고 몇 분을 문이 열린 채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앞차를 먼저 보냅니다 방송을 듣고 있으면 맞은편 급행을 탈까 싶은 마음이 든다. 몇 초의 순간에도 삶은 언제나 선택을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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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롱도 기다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건조의 과정이 있다. 마카로나주라고 거품을 올리는 과정이 끝나면 동그란 마카롱 반죽을 말려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잘 기다리는 나도 이 건조 시간이 참 더디게 느껴질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장마 때는 더 오래 공을 들여 건조를 시킨다. 건조는 마카롱의 모양을 잡아주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카롱 기법에는 건조 없이 구워내는 경우도 있지만 건조의 시간을 거치고 구워내는 마카롱 꼬끄의 식감이 훨씬 쫀득해진다. 꼬끄는 마카롱의 동그란 과자를 말한다. 마카롱을 위한 오븐에 건조기능이 있어도 실온에서 말리던 습관 때문에 여전히 자연바람 건조를 시킨다. 이역시 선택의 문제이다. 항상 하나의 방법이나 길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둘 중 하나,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라도 나에게는 어려울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결론을 낸다.

 

요즘엔 되도록이면 생각을 많이 안하려고 한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보니 놓치는 일들이 생긴다.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생각을 끊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지하철역에 붙은 저 문구가 오늘따라 더 마음에 들어온다. 안 되는 것에 힘쓰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 와 닿을 수 없다.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저기요, 천천히 가세요, 천천히.

 

50+에세이작가단 리시안(ssmam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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