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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넘쳐나는 시각 매체에 대한 피로감으로 라디오, 팟캐스트 등 오디오 기반 매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나 역시 작업이나 운전할 때 라디오를 습관처럼 틀고, 지하철이나 기차를 탈 때는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마침 마포 구립 서강도서관에서 다시, 라디오프로그램이 열려, 매주 토요일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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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은 8주 동안 5명씩 1조를 이뤄 도서관이나 책에 관련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조는 책과 어울리는 음료를 추천하는 <책과 한 잔(가제)>란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각자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긴 핫초코, 커피, 맥주, 칵테일 등 다양한 음료를 선택했다. 나는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와 어울리는 음료을 생각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미지인 따뜻한 와인 뱅쇼를 골랐다.

 

뱅쇼는 레드 와인에 오렌지·레몬 등 과일과 계피·정향 등 향신료를 넣고 끓여 따뜻하게 마시는 음료이다. 프랑스어로 뱅(vin)은 포도주, (chaud)따뜻한을 의미하는데, 겨울 추위가 혹독한 북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즈음에 만들어 마시던 전통이 독일과 프랑스 등에 전해져 겨울을 대표하는 음료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글루바인(Gluhwein), 영국에서는 뮬드 와인(mulled wine)라고 한다.

 

뱅쇼는 몸을 데워 피로를 풀고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마시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식 쌍화탕이라고도 불린다. 뱅쇼에 들어가는 계피나 말린 귤껍질(진피)은 한방에서도 몸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하는 약재로 쓰이니 근거 없는 비유는 아니다.

 

겨울 유럽 크리스마스 축제나 시장에 가면 뱅쇼를 종이컵에 담아 파는 포장마차가 흔한데, 한 손에는 뱅쇼(vin chaud), 다른 한 손에는 크레이프 누텔라(Crepe Nutella)를 들고 크리스마스 시장 돌아다니기는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겨울 풍경이다. 고운 붉은 빛과 따뜻한 온도의 뱅쇼는 사람들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녹여주는 훈훈한 음료가 아닐까.

 

2년 전, 글쓰기 모임 연말 파티가 생각난다. 미리 도착한 이가 저마다 가져온 와인이 여유가 있어 뱅쇼를 끓이면 좋겠다고 단톡방에 올렸다. 뒤늦게 가는 어떤 이는 과일을, 어떤 이는 향신료를 가져갔다. 우리는 커다란 냄비에 가져온 재료를 모두 넣고 뱅쇼를 만들어 한 잔씩 나눠마셨다. 지혜로운 스님이 빈 냄비에 돌맹이만 넣고 돌맹이국을 끓이겠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이 채소를 한가지씩 가져와 넣어서 결국 모두 맛있는 국을 먹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나는 온온(溫溫)한 시간이었다. 한두 달 뒤 코로나 19가 발생해 이렇게 모이는 일이 오래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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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히려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 겨울 프랑스에서는 '뱅쇼'의 판매량 급증했다고 한다. 프랑스 미디어 더로컬(thelocal.fr)의 보도에 따르면 포장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추위를 피하기 위해 따뜻한 뱅쇼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시기에 뱅쇼는 파리 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라는 인터뷰도 함께 실렸다.

 

오늘 뱅쇼를 끓여본다. 오렌지와 레몬은 굵은 소금을 깨끗이 씻고, 얇게 썬다. 사과도 동그란 모양을 살려 얇게 썬다. 냄비에 썰어놓은 과일을 넣고 계피 두 개, 정향 서너 개, 생강 한쪽을 넣고 와인 한 병을 붓는다. 설탕도 100g 정도 넣으면 달콤한 맛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30분간 뭉근히 끓인다.

 

달큰한 향이 온 집안에 퍼진다. 맛있게 만들어진 뱅쇼 냄비 안을 보니 라디오 방송 만드는 우리 조원들이 생각났다. 모두 개성이 강하고, 이제 돌이 지난 아기를 키우는 30대부터 40, 5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게 섞여 있다. 와인 속 여러 과일과 향신료가 함께 어우러진 뱅쇼처럼 우리의 각자 재능과 경험이 깊게 우러난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오늘 만든 뱅쇼는 잘 담아가서 조원들과 함께 나눠 마셔야겠다.

 

올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도 가까운 사람과 따뜻한 뱅쇼 한잔 어떨까요?

 

 

50+에세이작가단 전윤정(2un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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