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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열기를 가득 머금은 마스크로 숨이 턱턱 막히던 7월부터 다섯 달을 달려왔다. 드디어! 내가 속한 극단이 올리는 공연 강 여사의 선택 2021’이 진짜 코앞이다. 징글징글한 코로나 19 천하에서도 무대를 만들겠노라고, 우린 줄곧 마스크를 쓰고 연습했다. 연극의 꽃이라는 뒤풀이 한 번 안 했다. 네다섯 시간 연습 중 물 한 모금 마실 때도 눈치를 봐야 했던 지난한 시간의 끝이 보인다. 모처럼 한가한 월요일 오전. 위드코로나를 기념하자며 고등학교 친구들이 번개팅을 제안했다. 2년여만의 재회인지라 바로 을 외쳤다.

 

늦가을 볕 덕분인지 파란 하늘이 무척이나 깊어 보였다. 설레는 마음에 너무 서둘렀는지, 약속 시각까지 한참이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가을바람마저 유혹하니, 높다란 가로수가 예쁘게 물들어가는 거리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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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낙엽이 쌓인 곳을 골라 밟았다. 발이 닿을 때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취하고, 바사삭 흩어지는 마른 나뭇잎의 촉감을 즐겼다. 나만의 가을 소풍에 흠뻑 빠져, 눈부신 가을 하늘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가로수를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가로수가 회화나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마디! 흔히 가로수라 하면 플라타너스나 은행나무를 말하지 않던가. 물론 요즘에는 이팝나무, 배롱나무 등등 다양한 수종을 심기도 하지만, 회화나무는 무척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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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이다. 귀신과 나무를 합쳐서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민간에서부터 궁궐까지 즐겨 심던 나무다. 나무의 자태가 수려한 것이 꼭 선비의 풍모를 닮았다 하여,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은 공부방 앞에 심어 회화나무를 심곤 했다. 압구정로 가로수를 설계한 이가 길에 부여한 남다른 뜻과 기대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참 회화나무 아래서 감상에 젖어있는데 문득, 가슴 저 아래에 묻혔던 기억 하나가 쑤욱 올라왔다. 게다가, 묵혀둔 화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늦은 겨울밤이었다. 독서실에서 나와 부리나케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모처럼 대면한 새하얀 세상이 꿈결처럼 다가왔다. 난 아이처럼 폴짝거리며 걸었다. 그때였다. 제법 묵직한 눈덩이들이 날아들었다. 동네 개구쟁이 몇 명이었다. 녀석들의 눈덩이 공세를 떠밀려 가로수 뒤로 피해 보지만 어림도 없었다, 회화나무는 내 팔뚝보다도 가늘어 보였다. 눈덩이를 안 맞으려 이리저리 막 움직이던 찰나, 단단한 눈덩이 하나가 내 이마에 강타했다. 따악--! 청량하기까지 한 그 소리와 함께 내 몸은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눈덩이 안에 꽤나 큰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녀석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내 이마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시야가 흐려질 지경이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집까지 가는 동안 엉엉 울었다. 창피한 줄도 몰랐다.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겨우 현관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고 식구들이 웃기 시작했다. 아기 주먹만 한 혹을 이마에 달고 눈물 콧물 때문에 허옇게 얼룩진 얼굴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너무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이라니.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울어댔다, 서럽게 서럽게.

 

그 겨울밤, 인생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그 누구도 나의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인생은 어차피 고(), 인간은 어차피 고()라는 것을. 그러니 타인이 나를 알아주길 기대하지 말자고, 내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이른바 개인주의자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누구는 그런 나를 보고 정 없다라고 한다. 또 누구는 쿨하다고 엄지를 척 세우기도 한다.

 

내 허리통만 한 회화나무 한 그루를 살포시 안았다.

잘 컸다.”

회화나무가 내게 말을 건네주었다.

너두.

 

친구들 만나러 나선 가로수길에서 맛본 뜻밖의 재회. 오래전 친구와 오랜만에 마주 선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이제 내일이면 리허설 무대에 선다.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아니 대신해줄 수 없는 내 배역이 있다,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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