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방씨는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동안 밤낮 없이 취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은퇴 이후의 시간은 오로지 아내만을 위해 쓰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우선 여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기자 특유의 안테나를 가동시켜 전국의 비경지와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숨은 맛집 조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아내와 길을 떠났다. 아내도 좋아했다. 좋아하는 아내를 보며 김일방씨의 만족감은 배가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후딱 지나간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기분 좋게 나른해진 몸을 소파에 길게 누이고 있는 중에 아내가 술 한 잔을 제의했다. 여행 후 자주 있던 일이므로 싫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술이 몇 순배 돌고나자 아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 당신과 이렇게 놀아주어야 할까?"

 

김일방씨는 순간 얼큰하던 술기운이 확 가시며 몸이 바짝 말라왔다.

 

 

사람 이름만 빼고 본 기자 주변에서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김일방씨의 아내를 향한 마음은 갸륵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김일방씨가 취재로 바쁜 동안 아내는 그냥 집에서 갇혀 혼자서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 뒷바라지로 시간을 보냈겠지만 아이들이 큰 뒤로는 각종 모임과 강습 등으로 오랫동안 자신만의 일상을 가꾸어 왔던 것이다. 그럴 때 불쑥(?) 그 일상을 헤집고 들어선 남편의 거침없는 호의와 정성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반면에 아내의 일상을 흩트려 놓는 훼방꾼의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중국 고전 『장자』의 "지락(至樂)"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바다새 한 마리가 노나라에 날아 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귀히 여겨 궁으로 데려다가 향기로운 술을 주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일등 요리로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술 한 잔도 마시지 않다가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노나라 임금의 지극정성은 순결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새의 방식이 아니고 사람의 방식이었다. 새에겐 왕의 환대가 다만 괴로움일 뿐이어서‘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다가’결국 죽고만 것이다.

 

위 두 경우 부족했던 것은 한 쪽의 정성이나 진실된 마음이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일방적인 '정성과 진심'의 과잉이었다. 시인 김선우가 말한 적이 있다.

"너의 존재 방식에 섬세하게 깨어있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너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더라도 나는 너와 소통한 게 아니다."

 

 

은퇴자에게 가족과의 소통, 특히 "배우자와의 소통" 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은퇴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결혼식 주례사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지 않던가. 무릇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배우자와의 소통이다. 소통을 위한 첫 걸음은 배우자의 존재 방식을 지금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함께 30년 이상을 사는 동안 본 적이 없지만,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배우자의 특성과 기질까지 미리 앞당겨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탕수육을 소스에 '찍먹' 하지만 배우자는 '부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기껏 자장면을 주문했더니 뒤늦게 나타난 배우자가 "난 짬뽕!" 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리품을 팔며 돌아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배우자는 해변 나무 그늘에 늘낙지처럼 퍼질러 누워 멍때리기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만 배우자는 야구를, 나는 아침형이지만 배우자는 올빼미형일 수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

 

그렇다. 이거 다 지키려면 성인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 참 어렵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랑인 것을! 사랑만이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을!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함민복의 시 「부부」가 각별하게 읽힌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 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