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감독되기
-임순례 감독을 읽어내는 keywords

 

 

 

지난 7월 중순, 중부캠퍼스에서는 '리틀포레스트',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등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섬세하게 보여주기로 유명한 임순례 영화감독의 특강이 진행됐습니다.

열정적인 강의장을 뒤로 한 채,

1년만에 사랑하는 딸을 만나기 위해 인천공항을 떠나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의 삶과 영화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일본 도쿄 상공에서 시작한 글이 날짜변경선을 지나고 그랜드캐년 상공에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비행기 안, 작은 밥상을 펴놓고는 떠오르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차근차근 공굴려봤습니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살아온 삶을, 일하는 여성으로서 가다듬어진 딸의 얼굴을 마주보며 다시 떠올리고

타지에서 자신만의 길을 일구는 아이의 모습에 투영해보기도 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저와 같거나 다른, 다르고도 같은 50+세대와도 함께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ㅣ 사연 팔이 vs 영화 찍기
영화 찍듯 자신의 삶의 과정을 드러내며 감추기를 하는 임 감독. 그니의 이야기는 허풍선이 살은 빠져있고 단단한 뼈에 육질의 근육만이 붙어있다. 풀어내는 삶의 어휘들은 멋지게 꾸며 box에 차곡차곡 담긴 것이 아니라 널따란 함지박에 흐드러지게 널브러진다. 그니는 지난했을 삶의 고통을 살짝 감추며 드러낸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구걸하는 대신 삶의 사건을 한 장면 한 장면 영화 찍듯이 연결해낸다. 시간의 흐름에 얹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건에서 키워드를 가려낸다. 삶의 주제에 따라 삶의 사건이 배치된다. 소주제들이 연결되어 한 편의 영화가 찍히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구나 겪는 삶의 시간과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사건에 휘둘려 허우적대는 내가 아닌 한 발짝 떨어져 사건을 객관화하며 낯설게 들여다볼 수 있는가의 차이다. 

 

 

ㅣ자기 착취 vs 자기 배려
임 감독은 사회와 타인들이 만들어준 목표 설정과 성취의 자기 착취의 논리가 아닌 자기 변신의 논리를 가지고 삶을 이어왔다. 지금까지 그니가 영화감독으로 이룬 성취를 '개천에서 용났다.'식의 허접한 자기 계발의 해석이 아니라 자기 삶의 언어를 꾸준히 가꾸어 온 사람을 읽어내는 사건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삶의 굴곡과 고비를 '자기 선택과 결정'이라는 키를 잡고 헤쳐 나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길 위에 자신의 길을 내온 사람이기에 더 그렇다. 기울어진 운동장 사회 한국에서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몸피가 큰 여성으로 살아가기는 자신만의 언어를 갖추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고등학교와 대학 생활 속에서 영화와 접점을 갖게 된 계기, 동물권 행동 카라와 우연치 않게 맺은 인연, 다이어트 결심, 벌(蜂)과 공생하기 결정. 이러한 선택을 가능케 한 힘은 스스로 찾은 자기 안의 동기다. 타인의 눈총과 잔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동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기에 가능했다. 그니는 자신을 진정으로 돌보는 "자기 배려"의 시간을 다져온 사람이다.

 

 

ㅣ자발적 투항 vs 자발적 망명 
내가 생각하는 "자기 계발"이란 "자본의 요구에 기꺼이 계속해서 발가벗겠다는 각오"다. 자기 계발 왕국 한국에 수입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부어제( Paul Bourget) 의 명제는 중학교 교실부터 보험설계사 사무실에까지 붙어 있는 자기 닦달을 위한 금과옥조다.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붙어있는 글귀를 보고 사람들은 속으로 먹먹함을 느낀다. 서둘러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아껴 쓰며 생각대로 살아야겠다고. 이 순간 삶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게임과 왕따 놀이로 도피하고 성인은 음주가무로 몸이 절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갖는 생각이란 나의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만들어진 사회의 통념일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생각대로 산다.'는 타인의 욕망에 충실히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일이다. 임 감독은 '사는 대로 생각한' 사람이다. 자신의 몸으로 삶을 재구성하며 길어 올린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며 어떤 모델도, 원본도 없이 자신의 삶의 렌즈를 갖춘 '자발적 망명자'다.

 

 

ㅣ나만의 little forest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는 "나만"이라는 배타성이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길 내기다. 삶의 "작은 숲"이 필요한 이유는 무얼까. 임 감독은 "휴식과 재충전, healing, 그리고 성찰"이 필요해서란다.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의 말에서 내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챙겨보자는 것이다.
"little forest"는 어떤 나무들이 모여 있을까. 임 감독이 심고 싶은 작은 숲의 나무들은 5종이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세상"나무, "기억"나무, "물리적 공간"나무, "취미"나무, 그리고 "신념/가치관/종교"나무 등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많다는 것, 삶을 이어가며 기쁨과 슬픔의 기억을 함께 지닌다는 것, 나만의 삶의 책상을 놓을 수 있는 한 뼘의 공간, 삶의 재미를 북돋는 취미, 그리고 영혼을 깊게 매만져보는 일 모두 온전한 한 사람이 의지할 "작은 숲"이 된다는 것. "little forest"의 나무들은 서로 기대 그늘을 만들고 숨 쉴 공간을 마련한다. '숲속의 빈터'는 "잘 멈추고 쉬어가는 삶"을 위한 공간이다. 그 안에서 "고유한 줄거리를 갖는 삶의 이야기"를 짓는 일이 가능해진다.

 

 

ㅣ50+의 little forest
삶의 끝자락이 슬쩍 엿보이기도 하는 50+들의 작은 숲 가꾸기는 어떤 수종의 나무를 심어야할까. 임 감독이 건네는 5종 나무의 결을 살펴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균형 잡기"나무. 외골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반대방향으로 몸을 옮겨보고 삶의 평형수를 제대로 채워보자는 것이다. 이를 악물기보다는 가볍게 가운데로 가보길 시도해보기.
"외로움과 떠나보내기에 익숙하기"나무. 나를 지금껏 묶어 놓았던 '동창', '친구' 모임 등 사회의 질긴 끈들에 의문을 품어보기. 과연 이 끈들이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지 스스로 묻기
"소통과 공감"나무. 특히 후속세대와의 말 길 트기가 필요한 시점. 자신의 과거 경험에 묶여 잔소리 대장되지 말고 후배들의 사고의 차이를 가져온 사회의 맥락을 이해하려고 애써보기.
"도전하기"나무. 실패를 하더라도 얼굴 거죽이 두꺼워져 부끄러움을 덜 타는 나이. 그래서 배움에 겁도 나지만 새로운 IT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보려는 몸짓이 필요한 시기. 
"내려놓기"나무. 지루했던 영화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여운을 남기듯 지난 삶의 흠결에 집착하기보다 남은 시간 묶이지 않는 일이 필요한 시기. 관계, 욕심, 집착은 내려놓을 삶의 짐들.

 

 

ㅣ임순례 표 little forest
임 감독의 작은 숲의 기본은 "자연, 동물, 불교"라는 3종의 나무로 구성된다. 이 모든 나무들의 뿌리는 "자기 선택"이란 비료를 먹고 자랐다. 
영화 일로 도회지에 살다 과감하게 자연을 선택해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한지 15년. 도시 지역 업무에 따른 운전 부담도 크지만 새소리, 벌레소리에 지친 삶에 위안과 기쁨 그리고 에너지를 얻는다. 그니에게 자연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동물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또 다른 결을 지닌다. 어릴 적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고, 영화 성공 이후 찾아온 우울감을 동물과 함께 하며 떨쳐버렸던 경험 등은 그니의 동물 사랑을 전한다. 동물권 행동 카라의 책임을 맡은 것도 그 때문. 그니는 자연, 동물. 인간의 연결망을 확인하며 그 안에서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왜 불교일까. 사춘기 시절 맞게 되는 천주교 고해성사에 대한 저항감은 성인이 되며 불교로 관심이 옮겨갔다. 영화감독의 삶이란 것이 수많은 어려움의 연속인데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고 넘어가는 힘을 얻었다. 해변에 애써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밀려 허물어지자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찬찬히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 엄마는 모래성이 실체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니의 선택은 주어지고 갖추어진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갈고 닦으며 만들어가는 종교 쪽으로 기울었다.

"나만의 little forest는 나만을 쉬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도 그늘을 주고 열매와 산소를 제공하는 그런 숲이 되도록 하자! 가족을 넘어 타인들에게 베풀기가 보람 있고 의의 있는 일임을 조금 더 알아가자!"

 

 

임순례 감독의 삶의 여정은 처음부터 작성하고 계획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길을 내다보니 자꾸 새로운 길이 열리는 "계획된 우연(planned happenstance)" 이 연속된 삶이다.

그니는 좋은 영화감독이자 자기 삶의 훌륭한 감독이다.

 

*그니: [대명사] ‘그이’의 방언(경기)

 

 

 

 

날짜변경선을 지나는 뉴욕 행 비행기 안에서

중부캠퍼스 학습지원단 조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