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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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자이크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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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와 달리, 어느 정도 경험이 생기고 그에 대한 해석도 가능해질 무렵이 되면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안주할 곳이 생기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주 작고 좁은, 단조로운 일상이 시작된다. 고정관념의 보호(?) 아래,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살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이 없다. 쳇바퀴 속도에 맞게 자동 반응을 할 뿐이다.

 

우리는 대체로 본능 충족과 쾌의 향유를 원한다. 이 두 가지가 채워지면 ‘행복’이라고 느끼기 쉽다. 아니 행복인 줄조차 모른 채 아주 무난하게 무덤덤하게 그럭저럭 살게 된다. 이런 걸 두고 상팔자라 말하기도 하리라. 과연?

 

 

 

 

 

 

어려서부터 상팔자와는 멀었지만, 필자는 큰 사건에 휘말린(?) 적이 별로 없어 상팔자로 오인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크게 보면 우리는, 눈에 띄는 ‘외향적’ 삶과 조용한 ‘내향적’ 삶 중 하나를 산다. 디테일하게 보면 상황 따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에, 특정하기가 어렵다. 대다수는 이런 애매성 안에서 오가는 중일 것 같다.

 

필자의 일상은 다이내믹하지 않다. 실제 성향도 그렇고, 막판에 실제로 확정되는 일도 그렇다. 어쩌면 ‘생긴 대로 산다’는 점에서 복받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순전히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개인으로 겪는 일은 일일이 알 수 없는 데다가, 내향적인 사람들은 혼자서 끙끙대는 경우가 많고 민감성이 높아서 무슨 일이든 속으로는 크게 감응한다. 그래서 피로도가 높거나,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을 버티는 게 아닐지…. 사실은 이런 생각조차 뒤돌아보니 그렇게 해석되는 건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시대인 만큼 행복 또한 다를 게 분명하다.

 

저마다의 몫이 다르다는 건 때만 다를 뿐, 겪을 건 겪게 돼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명약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그럴 수는 없듯이, 자기와의 인연은 따로 있다. 그다지 큰 불편과 불만이 없던 필자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건 집안의 경제난도, 올해의 코로나19 사태도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 혹은 오만한 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듣는 시늉만 하면서도 자신은 잘 듣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도 반대로 생각했던 15세기의 일은 내 안에서 여전한가 보다. 지구는 나를 포함하고 있어서 내가 바라보기 어렵지만, 다람쥐 쳇바퀴라면 한번 멈춰 세워 볼 수 있다. 필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계속 돌던 중 만나게 된 브레이크. 속도를 낼 때 마주치는 장면과, 멈춰 섰을 때 보게 되는 장면은 천지 차이다.

 

비대면 속에서 만난 얼굴들이 있다. 다양한 연령대, 다른 관심사와 경험, 말투와 태도와 얼굴 표정들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다가왔다. 그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 건 세대 차이 때문일까? 그럴지도 몰라서 필자는 못 알아듣는 말들을 들리는 대로 적었다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기도 했다.

 

 다른 세계를 실감하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다. 존재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일과 그것이 나에게 해당된다는 걸 깨닫는 일은 별개다. 비좁은 일상 코드에 익숙해지면 ‘다른 세계’가 혼란스럽거나 귀찮기도 하다. 필자에게는 그 세계가 신선함과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50+세대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이를 잊고 살다가 몸으로, 증상으로 노화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한다. 준비가 안 된 결혼 생활에서 겪어내야 할 일이 많듯이, 노화를 밀쳐두었던 이가 감내해야 할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즈음에 만났던 탓인지 30~40대의 말들은 필자의 젊은 시절과 대비되면서 나이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에 대한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드는 건 선택이 아닌데, 그 자연스러움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약자가 되고, 을의 입장이 되는 일이다 보니 그 간극이 서럽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저들도 나이 든다는 걸 지금은 실감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겨났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 아기 때부터 유년·청년 시절을 지나 중년을 거치는 동안 필자는 그 당시에 어울리는 얼굴로 살아왔다. 지금이 한창인 젊은이들도 자신의 기준에서 그런 때를 지나게 될 테지. 각자 다른 때를 만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내 안에서 하나로 구성하는 일이 50+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준비해야 할 노년이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각자는 ‘모자이크 인간’이다. ‘내가 곧 너’라는 말은 그냥 쓰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네 모습을 보면서 나를 보게 되고, 내가 스스로를 환대할 여유가 있어야 너에게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점에서 충분히 진실이다. 사람 수만큼의 내가, 그 수만큼의 네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젊은 그들이 한 말을 일일이 주워섬길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서는 50+ 세대 때의 ‘흑백 논리’보다는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차이만큼 시대가 변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아직은 ‘통합’이 어려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는 정도? 그래서 인간은 공평한 존재인가 보다.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 앞에서 동등하고, 나이와 질병 앞에서 예외 없이 약해지는 것도 똑같다. 젊을수록 이 똑같아지는 순간을 피하려고, 다르게 살려고 그렇게 애쓰는 건지도 모른다.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젊은 날엔 근본적인 아픔보다 관념으로(?) 아프기 일쑤다. 나이 들수록 몸이 바빠야 하는 이유는 젊을 때 쌓은 관념을 털어내려는 반작용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움직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건 작용과 반작용의 균형으로 가능한 일이니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산다면 비 오는 날 챙길 우산을 마련한 셈이다. 새로운 말이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듯이, 일상과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것들에 대한 정성과 주시가 있을 때에야 한층 풍성해진 상상력의 만찬을 베풀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