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영주로 가는 열차에 있다. 열차는 얼마나 오래도록 달려야 하는지 모른 채, 자기의 힘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해서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이 열차에 힘을 빌려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영주다. 

오래전 기억에 영주 뒤에 달린 부석사가 떠올랐다. 영주 뒤에 매달린 소수서원도 기억난다. 언제인가 벽화를 보겠다고 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을 보러 갔다가 묵밥 한 그릇 먹고 온 일도 생각난다. 영주라는 이름 뒤에 달린 곳이었기에 지금 가는 영주를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영주라는 도시에 발을 내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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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와 가까운 부석사를 바이크로 여행했던 날도 영주는 모르고 부석사만 알았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두 번째 이유라면 언젠가 태백으로 여행한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행이 아니라 문상이었다. 함께 했던 직원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상하였을 때 당도했던 곳은 태백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문을 하러 가면 세태가 읽힌다.

고관대작도 당신이 그 관직을 가지고 세상을 뜨면 쓸쓸하다. 그러나 고관대작의 관직을 상주가 입고 있으면 그 장례는 법석이다. 이는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일이다.

 

함께 했던 직원은 많았겠지만, 그때 열차를 타고 홀로 당도한 태백은 황량했다. 과거의 그곳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날이 저물어 어둠이 배경이 되었던 그때는 그랬다.

밤이 이슥한 그때, 문상을 마치고 돌아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 하룻밤 태백이라는 땅 아래 머리를 묻는 일도 괜찮으리라. 그래서 태백 어느 작은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작은 여관방 이곳에 스며든 아픈 막장의 무게가 탄가루보다 검게 방 안을 도배했다. 그때 문상을 하였던 직원이 이름이 영주였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각인된 이름으로 영주를 지금 찾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태백의 작은 여학교의 건물이 유난히 가슴에 맺혔다. 황지라는 교명을 달고 있던 여학교 교정에서 조금 벗어나니, 절집은 무너지고 단아한 자태로 살아 있는 삼층석탑이 황지라는 이른 만큼 아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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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과 황지의 검은 길과 좁고 푸른 하늘 그 곁에 다소곳한 태백 본적사지 삼층석탑.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태백


새 아침이 되어도/ 씻어도 씻어도/ 태백의 검은 길은/ 희어질 길 없으리// 태백인 이상…// 황지…/ 그냥…// 이름과 지명이 아릿한/ 황지의 이름을 명찰로 달고 있는 여학교 교정에/ 아침 공부가 한창일 이 시간 교정/ 서성이는 내 그림자에 소스라친다// 놀라운 세월의 마술이다/ 다 보이는 게임을 지금 즐기고 있다// 발길은/ 태백 본적사지 삼층석탑 앞// 천 년 전 햇살이/ 태백 본적사지 삼층석탑 지붕돌 아래/ 떼구루루 굴러// 햇살 한 톨 다시 지붕돌 위에 올려놓으려/ 손을 뻗치자/ 천 년/ 석공의 정 끝에/ 햇살이 쫙~// 내 욕심의 머리끝에/ 그 햇살로/ 사정없이 쫙~// 훼손된 석탑 아래/ 얻는/ 조촐한 세상의 기쁨

얼마 전 영주가 고향인 지인으로부터 영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작가분이 영남일보에 기고했던 기사라고 소개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의 이야기 속 이야기가 너무도 보고 싶은 마음에, 내일이 아닌 지금 영주를 찾게 되는 마지막 이유가 될 것 같다.

 

지금 가는 영주행 열차는 무궁화호다. 최근에 KTX라는 열차가 새로 개통이 되어 영주가 고향이거나 일이 있어서 가시는 분들에게는 문명의 이기라는 편리한 도구로 활용이 되기에 감사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멋없는 수단이 있을지 싶기도, 어쩌면 무궁화호가 요금 편성 체계상 상위에 있다고 해도 이를 택할 것 같은 생각인데, 왜 그런지 스스로 묻고 답한다.

 

이 열차가 사람 사는 모습을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지 싶은 옛 생각이 묻어있어서 그러하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가끔은 두 등급의 열차가 같은 도착지로 비슷한 시간대에 플랫폼에 머물 때, 소득 활동은 없으나 낭만은 가득할 젊은이가 KTX에 오르고, 나는 잠시 후 무궁화 열차에 타기 위해 머물러 있는 순간에 열차 푯값의 힘이 강렬하게 발휘되는 느낌을 받지만, 안녕하며 빠르게 떠나는 열차를 보낸 후에는 무궁화 열차의 효력은 이후 계속 무궁하다는 것을 느낀다. 더 천천히 더욱더 느리게 저들을 멀리 보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생각은 나 지금 금융·경제 강사라는 무의식의 결과일지)

 

열차 안의 풍경도 세태의 흐름에 벗어날 수 없다. 옛날 무궁화 이전 통일호나 비둘기가 나를 때는 달걀과 양갱과 같은 간식이 열차 여행의 추억을 나무 기둥에 못을 처박듯 강렬하게 심어주었고, 그때 양갱이나 달걀을 사 먹기 위해서 주머니를 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용케 주머니에 그 값이 있었다고 해도 “계란주세요”라는 말이 서툴러 서울역을 나와서 집에 가는 길에 한 꾸러미 달걀을 사서 한껏 다 먹어보지만, 열차 안에서 먹는 맛이야 나겠는가. 헛배에 구토만 부르고 말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추억으로 달걀을 삶아와도 코로나로 그때의 향수를 제대로 누릴 수 없으니, 그때의 그리움이나 지금의 아쉬움이나 늘 품고 살 일이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열차는 복중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영주역에 도착한다.

 

영주에서 겉으로는 기고문에서 같은 옛 모습을 찾을 길은 없다. 우리나라 어딘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사는 동네가 어디 있으랴. 그렇게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도 가끔은 유럽의 도시나 아니면 아직도 문명의 침해를 받지 않은 지역을 볼 기회가 있을 때 그 변함없는 모습의 힘이 어디에 있을까 자못 의구심이 든다. 아마 문화선진국이라는 이름이 그 힘이거나 아직 문명이 건들지 않은 밀림 속이나 대양에 숨어있는 부족들의 섬이란 이유겠지만. 가끔은 여행지 도시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가 그 당시의 마차에서 지금의 자동차인 것 외에는 다름이 없을 때, 그 충격이란 저들은 개발의 이익을 계산도 못 하는 사람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다.

 

변하는 영주시의 그 변화의 틈새에서 지난 시간을 찾아보려는 것이 오늘 영주에서의 나의 일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이를 찾을 것인가? 천천히 걷다 보면 그런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을지…

 

도착한 유천동 영주역에서 첫발을 뗀다. 그리고 영주시청으로 달려갔다. 우선 영주의 옛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영주시청에서 만난 두 부처의 직원은 매우 친절하고 신속했다. 필요로 하는 자료를 영주 시내에 있는 동안에 정성껏 보내 주었다. 대한민국 모든 공무원이 이러한 마음 자세라면 좋겠다 싶은 힘없는 국민의 바람이 소원 성취를 하는 날이다. 이 자리를 빌려서 두 공무원에게 뜨거운 감사를 다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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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시청에서 바라본 영주 시내 모습과 지금 시청에서 바라본 유천동과 멀리 철탄산의 같은 모습. 논밭에 들어선 건물들은 영주를 계속 다듬고 키워왔다는 증명사진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우선 영주를 찾기 앞서서 영주의 일기장을 몇 장 넘겨보자.

개인 생활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의 변화도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 사이에 그 크기나 양에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다. 우리의 온몸이 또렷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주의 과거도 지난 1961년 대홍수 시 사진에서 보듯이 옛날 시골 여느 마을과 같이 초가지붕과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이 곳곳에 있었다. 지금도 관사골에 슬레이트 지붕의 키가 낮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도로의 한 블록 전체가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이 오롯이 남아 그 시대의 건축물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어 우리의 발길을 유혹한다.

 

영주는 지금도 X자로 교차하는 철로 노선을 보면 철도의 중심지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 역사는 1940년 영주면이 읍으로 되고 이듬해 영주~안동 간 중앙선의 개통과 함께 시작된다. 중앙선의 개통은 일제의 한반도 자원 수탈목적으로 물자 수송의 원활을 위하여 남북을 횡단하는 철길을 영주의 서천변을 따라 부설했다. 영주역은 지금의 중앙시장 자리에 당시 가장 대로였던 중앙통에 1941년 7월 1일 첫 영업을 시작했다. 영주역 자리에는 지금 기념석과 주변에 당시의 사진들이 거미줄에 갇혀, 지난 세월을 추억하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지금 구역에서 동쪽 분수대 삼각지에 이르는 과거의 역전통과 육전거리 그리고 염매시장 등의 활기찬 모습 그대로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도시재생 지원센터에서는 구역세권 도시재생을 위하여 영주시 역전(驛前)을 역전(逆轉)이라는 이름 아래 구도심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고 그 열매를 따고 있다. 부러운 것은 대부분 건널목에는 신호등이 없어도 오가는 차들이 진행에 어려움이 없다. 조용한 거리에 영주시민의 옛 추억과 향수의 밤을 엿보고 싶어 영주 후생시장의 소백여관에서의 하룻밤을 위하여 다시 영주를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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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길 X축의 중심으로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는 영주역.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영주의 모습을 바꾸어 논 사건이 있었다. 1961년 7월 11일 영주 전역이 물바다가 된 대홍수였으며, 주민들은 순식간에 들이닥친 물을 피하여 철탄산과 구성공원들로 피신하였다. 당시에 고지대였던 관사골은 다행히 그 피해를 면하였다. 당시 수해대책본부는 피해 복구를 위하여 원당천 제방 둑을 끊고 현 영주역 방향으로 물길을 돌렸다. 그렇게 며칠 후 영주역에 박정희 소장이 나타났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소장이 직접 영주로 와서 피해복구지시와 함께 1962년 3월 30일 서천 직강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심어 놓은 기념식수 한 그루가 삼판서 고택 뒤쪽에서 키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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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바다가 된 영주시와 영주시 수해 피해 복구 지시를 위해 영주역에 나타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영주시 제공

 

1962년 5월에는 경북선의 노선을 바꾸어 점촌과 예천 그리고 영주의 직선화 공사를 시작하고 경북선은 1966년 10월 10일 완공하였다. 이 공사로 중앙선과 영동선이 김천으로의 경북선을 통해서 경부선과 연결되었다. 이렇듯 50~60년대에 중앙선, 영동선과 경북선의 중심 X축의 영주역으로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라는 말대로 당시 영주의 호황이 눈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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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선 개통으로 중앙선과 영동선이 경북선을 통해서 경부선과 연결되었다. ⓒ 영주시 제공

 

당시 영주역 역전통의 추억과 전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역전 풍경이 그리울지 곁에서 그 모습을 잔잔하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영주역도 1973년 말 33년의 수많은 사연을 안고 물길이 바뀌고 길이 따라 변하면서 신시가지로 새로운 관공서가 들어서기 시작하자 1973년 12월 23일 영주역은 유천동으로 옮기게 된다. 구도심은 1984년 원당천의 물길이 외곽으로 돌려지고 그 자리는 넓은 아스팔트길 원당로로 변하였으며 영주역 앞 중앙통의 육전거리의 상권은 지금 영주역 앞 번개시장으로 이동되었다고 하나 최근의 코로나와 닥쳐온 불황의 중복 더위에 지쳐서인지 번개시장은 방학처럼 조용하였다. 그런데도 영주역은 여전히 중앙선으로 중간역과 경북선의 종착역으로, 영동선의 분기역으로 철도의 X축의 중점에 위치하며 그 기능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시청에서 신도시로 향한다. 지역의 경제권을 가늠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이 시장을 찾는 일이다. 영주역을 거쳐 구역 중앙시장의 상권이 이주했다는 신영주 번개시장을 찾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시 시장의 개념의 번개시장은 아니다. 오히려 정기와 상설을 병행하여 운영한다. 번개시장의 끝자락은 영주종합시장과 이어져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시장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시간대에 따른 요일별 편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코로나의 여파와 최근의 불황의 늪에 빠져든 느낌이다. 시장길을 걷는 중에 거래를 흥정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손님이 아예 없었다.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구 역전의 상권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말에 대해 안타까움이 크다. 다만, 오늘 이 시간만의 상황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장통을 왕복하여 꽃동산회전교차로를 통하여 서천 가흥교로 나섰다. 가흥교에서 만난 서천은 진주처럼 맑은 물로 그나마 영주종합시장과 번개시장에서의 우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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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의 코로나와 침체한 경기가 만들어 낸 번개시장과 영주종합시장의 쓸쓸한 모습.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서천을 흐르는 물이 맑다. 옛날은 어떠했을까 부러움이 앞선다. 지금도 은모래가 갈치처럼 빛나는데 그때야 오죽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따가운 햇볕을 다 받아내면서 반짝이는 물결에 쉼 없이 불어대는 강바람이 흐르던 땀을 이내 씻어준다.

 

가흥교 앞에서 북쪽 구학공원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천변은 신을 벗고 맨발로도 산책하기 좋도록 예쁘게 꾸며 놓았다. 봄날이면 서천 뚝방의 벚꽃이 마음을 흔든다는 말에 봄날에 벚꽃 구경을 예약해야겠다. 꼭 와야겠다. 무더운 팔월 복중이지만, 어르신들이 천변의 의자에 앉아 서천 변에 놀러 온 바람에 더위를 씻고 계신다. 서천 강바람은 여전히 옛날 시골 바람 그대로이다. 그때 느끼지 못했어도 기꺼이 알겠다. 이유는 지독하게도 흐르던 땀도 백팩을 벗어 놓는 순간 땀이 사라졌다.

 

삼판서 고택을 가던 중간에 영주세무서 앞에 석불입상이 있다는 정보가 눈에 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 천변을 잠시 내려 몇 분을 걸으니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인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이 보호각 아래 단정하게 모셔져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높이 2.39m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1매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해 광배와 불상과 얕은 대좌를 조각했다. 후대에 철부지 누군가 눈을 쪼아내어 본 모습을 잃은 것이 아쉬웠다. 영주 시내 절터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조각 수법은 다소 투박하나 건장한 체구로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작품으로 본다. 석불입상 곁에는 서귀대에서 발굴한 슬픈 사연을 담고 있음 직한 오층석탑이 아무런 설명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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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에 꽃장식이 화려한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 영주동 석불입상.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고요히 통일신라 때부터 서 있던 석불입상을 바라본 후 다시 서천 둑길로 올라 구학공원의 삼판서 고택으로 오른다. 삼판서 고택은 영주동 431번지 지금 구성공원 남쪽 영주감리교회 곁에 있었던 것을 1961년 대홍수로 침수되어 기울어지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철거되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영주시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10월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장소로 옮겨 세웠다.

 

이 고택의 첫 주인은 정운경(1305~1366)과 그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1343~?) 그리고 황유정의 외손자 김담(1416~1464)이다. 김담의 아버지는 현령 소량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이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일은 이 고택에서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1342~1398, 아버지: 정운경)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김담은 1439년 세종의 명으로 이순지와 함께 역법교정에 착수해 1442년 칠정산내외편을 완성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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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판서 고택(정도전 생가)이 있는 구학공원과 옛 사진에 멀리 제민루가 보인다. 구성공원 사이로 옛 서천이 흘렀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삼판서 고택 바로 위에 제민루가 위치한다. 제민루는 조선 최고 지방병원으로 일컫는다. 제민루는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에 하륜이 군수로 부임 후 학교를 세우고, 누각 5칸을 세웠는데 긴 세월에 무너지자, 조선 1418년(태종 18년) 군수 이윤상이 의원 3칸을 다시 짓고, 1433년(세종 15년) 영주 군수 반저가 하륜의 뜻을 이어 옛터에 동제 6칸과 남루 5칸을 지었다고 전한다. 1467년 군수 정종소가 보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의국과 학교의 기능을 겸하는 건물로 세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의국으로 보다는 서당과 학자들의 글 읽는 장소로 사용되다가, 1591년 군수 이대진이 북쪽에 큰 건물을 재건해 의국으로 기능을 회복했다. 제민루에 대한 의국 기능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아들에게 제민루의 환약을 잘 복용하라고 권한 기록이 있다. 또한 제민루에서 수학한 유의 이석간은 음식으로 다스림과 사상을 모은 식치처방을 경험방에 담아 어려운 백성을 살피고, 영주의 선비들이 예방의학을 배우고 그의 생각을 전파하기도 했다. 운영 재원도 소수서원과 비교해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7~18세기 초에는 의국의 기능이 상실했지만, 1748년 영주의 사족들이 중건했으며, 1961년 대홍수로 붕괴된 것을 지역 사람의 뜻을 모아 1965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제민루가 있는 이곳은 1961년 대홍수로 서천의 물줄기를 바꾸면서 기존에 서천이 흐르던 곳에는 지금 영주시민회관과 더불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1961년 7월 11일 대홍수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민루에서 건너편 한절마을 서편 객산을 잘라 서천을 직선으로 만드는 직강공사를 지시하여 시작하고, 영주 수해지구 사령관 이성가 장군이 주도하였다. 1962년 3월 30일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영주 시가지의 모습을 바꾸게 된 직강공사의 준공식 날 박정희 장군의 기념식수가 제민루 곁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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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학공원에는 삼판서 고택과 가난한 백성의 식의치를 펼친 이서간이 공부한 제민루 및 박정희 장군 직강 완공 기념식수가 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제민루와 박정희 장군의 기념식수가 있는 구학공원을 우측으로 끼고 구성공원으로 향한다. 영주동 반구정은 지금 보수공사 중이다. 영주동 반구정의 역사는 이러하다.

반구정은 구성공원 서편 끝자락에 고려말 충절을 지킨 좌사간 권정이 옛 고려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반구정(返舊亭)이라 하였는데, 후학들이 왕의 미움을 살 것을 우려하여 반구정(伴鷗亭)이라 칭했다 한다. 조선 1780년(정조 4년) 안동권씨 후손들이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던 정자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며, 서원 철폐령에 없어진 구호서원이 반구정 곁에 있었다고 알려진다.

 

반구정에서 조금 오르면 구성공원 가학루를 만날 수 있다. 가학루 앞뜰에 화사하게 피워온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기염을 토하고 있다. 남도 원림 명옥헌의 배롱나무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다. 가학루 앞에 배롱나무를 심은 손길에 감사한 마음이다.

 

구성공원은 이성계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고을마다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산 형상이 거북과 같다고 하여 구성산성이라 불렸다. 지금도 옛날 성벽 일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구성공원 정상에 누각 가학루가 있다. 본래 조선시대 영천군 동헌의 문루로 영주초등학교(옛 영천군 관아터) 뜰에 있었던 것을 1923년 군수 전성오가 이곳으로 옮겼다. 전면 편액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며 후면 편액은 소우 강벽원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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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공원에 있는 외롭던 옛 가학루와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밭 위로 가학루. 배롱나무는 남녘 명옥헌 원림 배롱나무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구성공원은 1961년 대홍수기에 영주시민이 홍수를 피신했던 그곳이 아닌가. 80% 영주시민이 홍수 피해를 받았다고 하니 이곳에서 물에 잠긴 영주를 바라보던 심정이 어떠했을지 싶다. 불바위는 구성공원 산자락에 커다란 바위로 서 있다. 이 바위 봉우리 북쪽에 뒤새마을이 있는데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유명 풍수장이가 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 서편 아래 널따란 못을 파서 물을 가득 채우면 불기운이 약해진다고 하여 서편 아래 넓고 깊은 못을 파고 고을 서쪽에 있다 해서 서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1961년 7월 11일 대홍수로 없어지고 지금은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다른 이야기로 봉우리가 짐승의 뿔을 닮은 형상이라 뿔 바위라고도 불린다.

 

1961년 홍수 때 영주역과 불바위 사이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영주 시내는 순식간에 물에 잠기게 되었다. 지금 불바위 앞마을 담장에는 서천이 이곳으로 흐를 때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불바위와 함께한 서천의 아름다운 풍치는 물길과 함께 간데없고 주택지로 변한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그때 이곳에 살면서 이 풍경을 보았을 고향 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그리울지 싶다. 아쉬움을 담고 구 영주역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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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바위와 서천 직강공사 전에 흐르던 서천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주택담장에 그려져 그때의 모습을 그립게 한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365시장은 1930년대 영주역을 중심으로 하여 선비골전통시장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영동선이 개통되면서 ‘영주문어’ 등 수산물 판매로 번성했으나 영주역 이전 후 1973년 골목시장이 조금씩 형성되었다. 시장 이름의 ‘365’는 영주 지방이 북위 36.5도에 있음과 365일 상설됨을 의미한다. 내륙지방에 영주문어가 특산물이라는 것이 조금은 의아했으나 동해의 참문어가 영동선을 타고 묵호항을 출발하여 완행열차로 영주에 도착할 시점에 가장 맛난 상태로 숙성이 된다는 것이니 그 명성을 얻을 만하다. 그러나 지금 365시장도 역시 코로나 여파와 최근의 경기 불황으로 예전과 같은 활기를 찾을 수가 없다. 365시장의 가장 유명한 집은 떡볶이집으로 ‘랜떡’으로 영주시민의 추억이라고 한다. 365시장을 지나 영주역사를 찾는다.

 

영주역은 없다. 옛 영주역은… 현 중앙시장 앞에 기념비와 함께 게시된 사진 속의 영주역사는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어떤 역사 못지않게 중후하게 보였다. 구역은 지금의 여성복지회관, 중앙시장, 영주시농협, 우리은행 영주지점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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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구 영주역. 나는 이 사진 한 장 속의 영주역이 그리워 영주를 찾았다.

위풍당당해 보이는 영주역의 옛 모습이 이후 콘크리트와 유리벽 장식으로 세운 지금의 신 영주역보다 더 웅장해 보인다. ⓒ 영주시 제공

 

“영주역사는 일자형 평면에 십자형의 박공지붕을 올렸는데 정면 출입구 쪽이 삼각의 박공으로 솟아 그 기세가 꽤 높았다. 역 광장 쪽 출입구에는 작은 차양이 매달려 있고, 철로 쪽 출입구에는 기둥을 세운 차양이 길고 넓게 나 있었다. 역사 안 대합실에는 나무 의자가 빙 둘러져 있고, 자세히 보면 조금씩 모양이 다른 사각의 미닫이창이 햇살을 들이고 있었다. 

역 마당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몇 그루의 수양버들이 휘영청 늘어져 지게꾼이며 리어카꾼에게 휴식처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나무 그늘 속에 주저앉아 담배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역 앞에서부터 삼각지(현재 분수대)에 이르는 길에는 대폿집, 식당,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서 역전통을 이루었고, 중앙통의 포목전, 옹기전, 나무전, 싸전 등으로 이뤄진 육전(六廛)거리와 이어졌다. 역 옆의 후미진 골목에는 요염한 여인네들이 모여들어 사창가를 이루었다. 기차를 타고 오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던 그녀들의 거리는 요염함을 파는 ‘염매(艶賣)시장’이라 불렸다.”라고 류혜숙 작가는 그때를 더 그 시절처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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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역 플랫폼 방향에서 본 영주역. (저 역사가 지금도 있었으면 하는 꿈같은 바람) ⓒ 영주시 제공

 

옛 사진 속 영주역 때문에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영주에 온 것이다. 구역이 있던 자리를 돌면서 나는 저 시절의 영주역을 끌어 올리고 있다. 쉽지 않았다.

지금은 지난 구역의 영화가 그려지지 않는다. 역전 거리는 있으나 역사가 없으니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어떠한 산업도 당시의 기세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역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그 안에 만남도 헤어짐도 물물의 매매도 교환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는 새로운 유천동 영주역을 앞에 두고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오늘 과제이다. 지난 시절의 영주역 앞에서 만남과 아득한 헤어짐을 헤아려 보는 것뿐이다. 

 

영주역은 1941년 7월 1일 영주와 안동 간의 중앙선 개통식이 있었다. 1944년 경북의 임산물과 광산물까지 수탈하기 위한 영춘선(영주~춘양)은 강원도 무연탄 수송을 위해 철암까지 연장되어 영암선으로 철길을 넓혔다. 1956년 1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영암선은 우리나라 건국 후 최초 부설 철도로 1963년 동해북부선(동해~강릉), 철암선(동해~철암)과 함께 영동선으로 확대됨으로서 남북종관철도의 중앙선 영주역은 강원도 남부권과 연결되어 동서횡단철도의 교차역이 되었다. 이 철길은 1961년 7월 11일 대홍수로 영주시의 4/5가 물에 잠기고 철길이 휘어질 정도로 피해가 커서 그해 10대 뉴스로 선정되었다. 철로는 서천 물길과 함께 달렸다. 현재 중앙시장에 있던 영주역은 영주의 중심길이던 중앙통에 가까이 세워졌다. 영주역은 1973년 유천동 신영주로 옮기기까지의 만 33년간 영주시 교통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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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역 이전 후 영주역과 최근의 영주역 모습. 왠지 역사가 반쯤 잘린 모습이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구 사진 영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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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역 2층에 숨겨져 있는, 더 멋져 보이는 영주역사 조감도. 분명히 표시는 2022년 개통 예정의 역사라고 쓰여있다.

이런 모습으로 완공될 기미가 없어 보이지만, 옛 영주역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 숨어있다. ⓒ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50+시민기자단 민명식 기자 (msikm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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