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다. 사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민박 게르에 짐을 풀었다. 물이라곤 작은 플라스틱 통에서 빨대를 통해 나오는 게 전부였다. 빵과 요구르트로 끼니를 때우고 양치만 했다. 두 시간 동안만 전깃불이 들어오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폰과 디카를 충전해야 한다. 게르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잠잘 때 귀속으로 벌레가 들어갈 수 있으니 귀를 꼭 막으라는 주의를 받았다. 이렇게 열악한 곳으로 온 이유가 별을 잘 보기 위해서라니 불평할 수도 없었다. 소변은 적당히 보면 되고 대변은 멀리 떨어진 변소에 가야 하므로 손전등은 필수다. 그믐밤이라 하늘에 정말 정말 많은 별이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보건 지평선까지 별이 가득했다. 새벽이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아침에 주인집 염소가 게르 안까지 들어와 한 바퀴 둘러보더니 별거 없구만, 하는 표정으로 나갔다.

 


게르 지붕 위로 쏟아지는 별


투명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초원을 달렸다. 파릇파릇한 줄기에 매달린 하얀 꽃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야생 부추라고 했다. 밤에 게르에서 부추부침개를 곁들여 보드카를 마셨다. 전기 버너가 쓸모가 있었다. 두세 시간마다 차를 세우고 인솔자가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하고 외친다. 방뇨할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다. 파라솔이 필수품이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 주기도 하고 사진 소품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엉덩이 가리개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초원에서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인솔자의 구호에 맞춰 몇 번이나 뛰었지만, 엉거주춤한 자세 아니면 발이 땅에 붙어 있는 사람이 많아서 멋진 사진을 건지지 못했다.

 

부추꽃이 만발한 초원


 여행 성수기인 여름이 우기이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소나기가 내린다. 초원은 순식간에 흙탕물에 잠기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호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웅덩이가 생긴다. 시야를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뭉쳐 있는 비구름을 보면 저 멀리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구나, 짐작할 수 있다.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멋진 무지개가 뜬다. 수십 년간 본 무지개보다 더 많은 무지개를 며칠 동안 보았다. 지평선을 잇는 쌍무지개가 멋지지 않은가?

 


지평선을 잇는 쌍무지개


타루박과 가끔 마주치는데 몽골리안 마못이라 불리는 설치류다. 호기심이 많고 두 발로 서기도 해서 귀여운데 정체를 알고 나면 가까이 가지 못한다.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를 옮긴 녀석이 바로 타루박이다. 고기 맛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잡아먹었다고 한다. 초원을 달리다 보면 야생마 무리를 자주 만난다. 망아지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헤어지기 싫었다.



물가를 거니는 말떼


산길을 달리는 건 청룡열차를 타는 거 만큼 다이내믹하다. 솟구쳐 오르고 곤두박질을 치고 아래로 내리꽂힌다. 안전 벨트도 없는 푸르공을 탔으니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의자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느라 지친 푸르공과 함께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눈치껏 소변보는 것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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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가는 길목에서


비얀자크는 돌이 되지 못한 퇴적층 지대인데 붉은색이 매혹적이다. 돌이 되지 못한 이유는 나이가 젊은 신생대 지층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침식되기 때문에 매년 풍광이 달라진다고 한다. 1922년 공룡 화석이 발견되었다. 초원에서 실패한 단체 점프 씬을 이곳에서 다시 찍었다. 사진사가 절벽 아래 있으니 모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절벽 위에서 함께 뛰다

 

어두워지기 무섭게 검은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거리더니 고막을 찢을 듯 천둥이 크게 울렸다. 하늘 여기저기서 붉은 섬광이 쏟아졌다. 천둥의 신 토르가 종횡무진 하늘을 내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몽골에 와서야 인간이 왜 토르를 만들어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에 별이 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나와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동쪽 하늘을 계속 노려보았다. 하늘이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초원과 사구와 산을 넘어 다가오는 여명이 정말 황홀했다.

 


초원과 사막과 산을 품은 여명


비움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몽골에 가 보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러 가는 여행의 묘미가 어떤 건지 알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