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다.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는 표현이다. 사람은 이름을 부르며 소통한다.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는 빛깔과 향기가 담겨 있고,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그렇기에 불리지 않는 이름, 눈빛 교환 없는 상대는 존재 의미가 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를 수 없고, 불릴 수 없고, 눈빛을 마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하늘의 뜻인 천명(天命)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다. 물론 군주에게도 이름이 있다. 세종은 이도(李祹)이고, 정조는 이산(李祘)이고, 순종은 이척(李坧)이다.

 


수릉(綏陵). 문조와 신정왕후를 모신 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경내에 있다. <출처: 이상주>

 

그러나 전통시대에는 임금의 이름을 부르거나 쓸 수 없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눈 맞춤도 할 수도 없었다. 행사 기록화 등에서도 왕의 얼굴을 그리지 못했다. 화공은 옥좌 뒤에 펼쳐진 병풍인 일월오봉병풍을 배경으로 의자를 그려 임금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은 신성불가침한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금의 이름은 ‘숨기다’는 뜻의 휘(諱)로 표현한다. 이름 부름을 피하는 게 피휘(避諱)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은 역대 임금의 이름을 줄줄 외워야 한다. 과거 답안지에 역대 임금의 이름자를 쓰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관리도 공문서에 임금의 이름을 쓰면 처벌되었다. 신하들은 임금의 이름과 같은 의미나 발음이면 개명을 했다.

 

문조 축문. 문조의 제향 축문에는 117자의 긴 이름이 나온다. <출처: 이상주>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최석만이다. 그는 현종의 어릴 때 이름인 소휘(小諱)를 피하여 석만(錫萬)을 석정(錫鼎)으로 바꾸었다. 세 살 때 왕세자에 책봉된 문조의 이름은 영(旲)이다. 이 글자는 주로 '대'로 발음되지만 당시 왕실에서는 '영'으로 읽었다. 이 때 함경도 관찰사가 김이영이었다. 그의 이름 끝 자 발음이 세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는 곧바로 상소를 올린 후 이영(履永)을 이양(履陽)으로 고쳤다.

 

이처럼 임금의 이름으로 인해 많은 불편이 따랐다. 이에 나라에서는 임금이 될 가능성 있는 왕자의 이름을 가급적 한 글자로 했다. 또 실생활에서는 쓰이지 않는 희귀한 글자를 택했다. 때로는 기존 한자의 음과 다르게 읽게 했다. 백성의 불편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종묘의 정전 15실에 모셔진 문조(1809~1830년)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졌다. 이름이 무려 117자다. 또 임금을 하지 못했지만 훗날 왕으로, 다시 황제로 추존되었다. 이런 특이한 이력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다. 117자의 이름과 보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왕과 황제로 추존된 것은 효도와 관계있다.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좋은 의미의 이름인 존호를 계속 더했다. 

 

죽은 뒤에 왕으로 올리는 추존 역시 마찬가지다. 군주가 된 후손이 선조에게 예를 다하고, 나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과 황제로 추존한 것이다. 문조는 효명세자 시절인 22세 청춘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재 추존 된다. 임금을 하지 못했지만 역사의 변천에 따라 사후 왕으로, 다시 황제로 거듭 신분이 상승된 것이다. 문조는 헌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16차례나 시호가 올려진다.

 

시호는 왕실이나 나라의 경사와 정치적 목적이 겹쳐서 가상 되었다. 문조의 존호 가상은 문조의 대리청정 60주년, 문조의 혼인 60돌, 신정왕후 국모 활동 50년, 신정왕후 탄일, 신정왕후 칠순, 고종 즉위 30년, 대한제국 선포 등 때 이뤄졌다.

 

문조의 자(字)는 덕인(德寅), 휘(諱)는 영(旲)이다. 임금의 이름은 시호, 묘호, 시호, 존호로 구성된다. 시호는 명나라에서 전해온 것과 조선에서 정한 것이 있다. 묘호와 존호는 신하들이 올린 것을 국왕이 낙점했다. 그러나 문조는 중국에서 전해온 시호는 쓰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강목왕(康穆王)이라는 시호를 전해왔었다. 조선의 군주는 인조 때부터 중국에서 보내온  시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문조는 강목을 쓰지 않았음에도 묘호(문조)와 시호, 존호로 117자의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헌종이 즉위한 1863년, 임금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군주로 추존할 것을 건의했다. 또 다음 해에 홍운성렬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의 존호를 올렸다.

 

1869년에는 요흠순공우근탕정(堯欽舜恭禹勤湯正)이, 1875년에는 계천건통신훈숙모(啓天建統神勳肅謨)가, 1876년에는 건대곤후광업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의 존호가 각각 더해졌다. 그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장의창륜행건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 기태수유희범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 입경형도성헌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의 존호가 올려졌다
 


망료. 왕릉이나 종묘에서 제향을 모신 뒤 축문을 불사르는 의식이다. <출처: 이상주>

 

이로써 완전한 이름은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뤼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로 되었다.

 

117자의 이름 중 종묘의 신주에는 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의 16자가 빠진 채 101자만 새겨져 있다. 고종 6년(1869)과  고종 12년(1875)에 올려진 존호다. 1869년은 문조 탄신 회갑(回甲) 기념 존호 헌상이다. 그 해 1월 3일 고종은 종묘 춘향대제를 친행하면서 요흠순공우근탕정(堯欽舜恭禹勤湯正)을 기록한 책보를 올렸다.

 

고종은 12년에 문조의 세실(世室) 기념으로 존호를 마련했다. 신주는 4대가 지나면 인연이 끝난 것으로 보고 땅에 묻는다. 조선 왕실에서는 정전의 신주를 4대가 지나면 영녕전으로 이안했다. 세실은 불천위로 영원히 정전에서 제사를 받는 왕이다. 문조의 추상존호책보례는 그해 12월 20일 종묘에서 행해졌다.

 

종묘의 신주에 16자가 빠진 이유는 알 수 없다. 조선말의 혼란기 탓으로 이해되지만 그 후에 올린 존호가 새겨진 것을 보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101자의 글자도 새기기는 녹록치 않다. 세로로 두 줄로 새겨진 글자 당 크기는 2mm에 불과하다. 아주 작고 세밀하게 새긴 글자는 육안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다. 현미경으로 판독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문조 제향을 모시는 제관. 앞줄 세 명은 술을 올리는 헌관이고, 뒷줄은 제관이다.

노란 거처에는 왕이 대기하고 좌우로 호위하는 좌장례와 우장례가 봉무한다.<출처: 이상주>

 

긴 이름에 따른 에피소드도 있다. 종묘대제와 왕릉제향 때 문조에게 제사 드리는 축문을 읽는 대축관은 무척 힘이 든다. 10여 분 동안 문조의 긴 이름을 독축하면서 무척 긴장하게 된다. 한자라도 틀리게 읽어서도, 운율을 잃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스물 두 살의 짧은 생을 산 문조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문조는 스물한 살 때 궁중무용의 으뜸으로 꼽히는 춘앵전을 창제했다. 어머니인 순조 숙황후의 보령 40세를 맞아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춤이었다. 봄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독무로 연행하는 정재(呈才)다. 대궐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가 정재다. 문조가 창제한 이 춤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앵삼을 입고 화관을 쓰고 춘다. 또 오색한삼을 양손에 끼고 육자길이의 화문석위에서 한없이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 동작을 보인다.

 

문조는 할아버지인 정조의 문예성을 빼어 닮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요절로 인해 재능을 꽃 피우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인 문조는 외삼촌인 김유근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우리나라 부채, 중국 부채, 좋은 향 등과 함께 담뱃대 등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여섯 살 때 쓴 편지에는 사탕을 달라는 아이의 순진함이 묻어나고 있다.

 

內舅承旨開坼(내구승지개탁) 卽承審夜間氣候萬重 不勝喜幸 二封唐果 食之甚美 後日又爲覓送 望望不備(즉승심야간기후만중 불승희행 이봉당과 식지심미 후일우위멱송 망망 불비)

편지를 받고 밤에 편안히 보내심을 아니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과(糖果) 두 봉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문조는 117자의 긴 이름자만큼이나 조선 부흥을 위한 큰 꿈을 꾸었다. 그러나 웅지를 펼치지 못했다. 그가 만약 수명이 길었다면 조선 후기는 색다른 빛이 보였을 수도 있다. 안타까움에 불러 보는 길고 긴 이름의 효명세자, 문조익황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추억이련가. 부국강병, 국태민안을 염원했으나 심중의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승하한 문조의 큰 뜻은 117자의 긴 이름에 깃들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