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이 생명이다. 문헌이나 유물 등으로 고증될 때 학계에서 인정된다. 여기에 역사의 맹점이 있다. 기록된 역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록의 왕국’인 조선시대에도 문헌 흔적을 남긴 이는 극소수다. 불완전한 역사 복원 방법은 문헌, 유물, 유적 확인과 함께 구전, 현장 취재를 종합하는 것이다. 이를 비교 분석하고, 창의적 상상력을 더하고, 근거를 찾을 때 실체적 진실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다. 문헌의 맹목적 신뢰는 피해야 한다. 특정 사실을 글로 표현할 때 주관이 개입될 소지도 있다. 일기를 쓸 때 자기합리화 또는 일부 미화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잘 알려진 문헌에 바탕 된 역사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색다른 스토리를 발굴할 수도 있다. 역사 지식은 논문, 대중서적, 각종 기관의 홈페이지를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문화재 탐방은 현장 확인을 통해 문헌과의 합치를 보고, 문헌과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살피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생각하는 의미가 크다. 이 같은 관점에서 양녕대군(1394~1462년)은 스토리의 보고가 될 수 있다.

 

봄날에 꽃들이 활짝 핀 양녕대군 묘역. <출처: 지덕사>

 

양녕대군은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큰형이다. 그는 정국의 변화로 인해 햇수로 16년 동안 지켰던 세자위에서 물러나 시, 서, 음악 등 예술과 풍류로 세상을 잊었다. 그러나 69세로 숨질 때까지 나라 걱정을 끊임없이 했다. 폐 세자 신분으로 유배 중이던 그는 당시 도성 밖인 국사봉(國思峰)에 올라 경복궁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한 역설로 조선은 성군인 세종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인간적 고뇌와 바람은 국사봉 줄기인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에 잠들어 있다. 그의 묘와 사당인 지덕사(至德祠)가 있는 곳이다.

지덕사에서는 새 해 첫 날에 양녕대군을 기리고 후손들이 상서로운 한 해를 다짐하는 차례를 지낸다. 또 산소를 찾는다. 새 해 첫날부터 후손들이 찾는 양녕대군 묘소에서는 3가지 특이점을 읽을 수 있다. 

묘는 곤좌간향(坤坐艮向)이다.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했다. 양택인 집이나 음택인 묘는 남향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국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묘는 북향이다. 이유도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풀이는 오늘을 사는 이의 몫이다. 

하나, 풍수지리 시각이다. 좋은 묘 자리를 찾는 이들은 남향을 선호한다. 하지만 왕족이나 재벌의 일부 묘는 곤좌간향도 있다. 북향에도 명당자리가 있다는 의미다. 일부 지관은 국사봉 왼쪽 중하단인 양녕대군이 잠든 곳을 상서로운 묘혈로 본다. 국사봉은 해발 183미터로 위압적이지 않다. 국사봉 자락은 지극히 아늑하다. 특히 묘에 쓰인 곳은 편안함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둘, 옥좌에 대한 미련이다. 양녕대군은 세자위 양보로 미화도 됐지만 권력의 속성상 현실성이 희박하다. 양녕대군과 추종 세력은 집권 의지를 버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양녕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끝내 옥좌와는 인연이 없었다. 북쪽과 북극성은 임금을 상징한다. 사후에라도 왕이 되기를 바란 후손들의 간절한 염원이 북향의 묘에 담겨 있을 수 있다.

 


양녕대군 묘의 봉분 잔디의 일부는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이끼로 대체되는 변신을 한다. <출처: 지덕사>


셋, 효도와 나라사랑이다. 묘에서 종묘와 경복궁이 바로 보인다. 종묘는 태종과 태조 그리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조상이 모셔져 있다. 후손으로서 효도를 다하고 싶은 간절함일 수 있다. 또 조카인 세조와 후대 왕들의 바른 정치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도 생각할 수 있다. 양녕대군은 국사봉에 올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과 나라의 일을 걱정했을 것이다.

양녕대군 후손들은 이중에서도 효도와 나라사랑의 결과로 믿고 있다. 이승창 지덕사 전 이사장은 “양녕대군은 큰 틀의 효도와 나라사랑을 했다.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 왕세자위를 양보했고, 숨진 뒤 나라의 예장도 받지 않았다”며 “장자로서 역대 임금에 대해 효도하고 후대 왕들의 선정을 바라는 마음이 묘에 담겼다“고 말했다.

실제로 숙종 때 우의정 허목이 쓴 지덕사기(至德祠記)에 왕자의 깊은 뜻이 기록돼 있다.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라. 묘비를 세우지 말라. 상석을 놓지 말라. 산소 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 내외손을 막론하고 (이 지역에) 묘를 쓰게 하라.”

 


양녕대군 묘제다. 양녕대군 묘의 석물은 사후 200여 년에 구비됐다. <출처: 지덕사>

 

유언에 따라 양녕대군의 묘는 처음에는 봉분만 조성됐다. 묘 조성 200여년 뒤에 7대손인 참판 이만이 묘비, 장명등, 문인상을 세웠다. 또 2002년 묘역 정비 사업을 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묘가 조성된 이후 500년 이상 이끼가 자라는 신비로운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묘에는 봄과 여름에는 푸른 잔디가, 가을에는 황금색 잔디가 봉분을 덮는다. 겨울에는 상당수 잔디가 이끼로 대체된다. 이는 묘가 북향인데다 주위 소나무 잎이 떨어져 잔디 생육 여건이 좋지 않은 데 있다. 더 큰 원인은 관리에 있다, 잔디가 사라진 곳에는 이끼류로 금세 대체된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유언대로 후손들은 소나무 벌목을 하지 않고, 수시로 잔디만 보식한다.

묘역은 여름과 봄에는 마르고, 겨울에는 습한 현상이 반복된다. 여름에는 잔디가 무성하고 겨울에는 이끼가 확산된다. 봄과 가을에는 과도기 현상이 보인다. 양녕대군의 유훈에 따라 화려하게 묘소를 치장하지 않는 ‘효성’이 잔디와 이끼가 순환되는 드라마로 연출되는 것이다.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양녕대군 묘에서는 효도와 나라 사랑 그리고 자연과 하나 되고, 주위에 번거로움을 주지 않으려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지덕사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양녕대군 사당, 또 하나는 양녕대군 종친회 이름, 그리고 양녕대군의 유덕과 사상을 계승 선양하는 재단법인 명칭이다. <출처: 지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