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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여행은 주머니가 가벼워서 주로 몸으로 하는 여행이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버스비를 아끼려고 웬만한 거리는 걷고 또 걷기도 했다. 요즘처럼 일부러 둘레길이나 순례길을 찾지 않아도 걷기 여행이 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생 때보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떠나고 싶어 안달 난 병에 걸려 틈만 나면 떠났고 여행 방식도 달라졌다. 시간은 금이라는 생각이 지배했고 무조건 편하고, 빠르고, 안락한 여행을 좇았다. 학창 시절 여행은 몸이 힘들어도 여행 후에는 가슴에 무언가가 가득 넘쳤다. 편하게 하는 여행은 공간만 이동했지, 여행 후에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상하게 허기졌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할수록 이 허기는 더 강렬했다.

 

이십 대는 아무 걱정 없이 떠났던 시절이기 때문일까? 아무 걱정 없는 건 지금 시선이겠지만 말이다. 이십 대 일기장을 보면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졌고, 고민은 추상적이었다.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았고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었다. 중년이 된 현재, 현실적 고민에 빠진다. 기대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노화한 몸으로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간을 잊고 사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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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자주 먹었던 음식을 성인이 되어 먹으면 음식 맛 덕분에 시간을 가로질러 여행을 할 때가 있다. 여행도 비슷하다. 편하고 익숙한 방법을 버리고 아날로그식 여행을 하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감성이 깨어난다. 지난가을 꼬박 5일 동안 제주도를 살뜰하게 걸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다인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자동차를 빌리지 않고 버스와 택시를 탔다. 둘째 날 제주올레길 중 15-B 코스를 걸었다. 이 코스는 한림항에서 시작해서 한담해안산책로를 거쳐 고내포구에서 끝난다. 제주도 서부 해안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차를 타고 여러 번 갔던 해안도로라 별것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두 발로 천천히 걸으며 보는 풍경은 차에 앉아서 차창 밖으로 보던 풍경과 완전히 달랐다.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속도는 내딛는 걸음에 맞춰졌다.

 

파도가 바위로 몰려와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만큼 보았다. 13km 반경에 있는 여러 동네를 지났다. 동네 분위기를 만드는 골목길을 누비고, 단아하게 자리 잡은 집과 집 사이를 걸었다. 바닷가 쪽으로 자리 잡은 카페 거리를 구경했다. 두 다리가 지치면 곳곳에 만들어진 야외 쉼터에 앉아서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오감으로 만난 풍경을 마음에 아로새겼다. 바람은 바다와 짝꿍이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바닷바람이 귓불을, 머리칼을 감쌌다. 바람의 속삭임, 바다가 몰고 오는 파도 소리, 긴 거리를 걸어 뻐근한 두 다리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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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서 있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바닷가에 이르렀다. 이 풍경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바닷가에 널린 돌덩이 중 하나에 올라갔다. 몸이 앞으로 잔뜩 기울어지고, 발 디딜 곳을 찾느라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시선은 서 있는 돌덩이 위에 머물렀다. 사진 속 나는 깎아질러 솟은 암벽이 아니라 돌멩이에 가까운 돌덩이 위에서 중심을 못 잡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들킨 것만 같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에 애면글면하고 갈피를 못 잡아 갈팡질팡할 때, 곁에서 같은 속도로 걸어주는 친구가 있으면 힘이 덜 든다. 흔들리면 손도 잡아주고, 뒤처지면 기다려주고, 힘들면 쉬었다 가자고 말을 건네는 친구와 걸으면,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났던 먼 거리도 걸을 수 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다 가기 전에 주변 풍경을 같은 속도로 바라볼 친구에게 산책하자고, 먼저 말을 건네면 어떨까

 

50+에세이작가단 김남금(nemon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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