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이 오후 햇살이 들어오자 보랏빛으로 반짝입니다. 늘 서쪽 바다를 향해 있는 탓에 제아무리 찬란한 일출이라도 남의 떡 보듯 아예 거들떠보지 않지만, 해가 중천을 지나 뉘엿뉘엿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그 누구보다 활짝 가슴을 열고 해바라기에 열중하는 변산반도 바닷가의 층층(層層) 단애(斷崖). 깎아지른 절벽에 보랏빛이 번지는 걸 보고 처음엔 석양빛에 붉은 물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 가가 곰곰 살펴보니 오랜 세월 강한바 람과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형성된 퇴 적암에 번지는 색이 석양빛과는 다릅니다.

 

노루 꼬리만큼 짧은 오후 햇살이 거무튀튀한 바위 절벽을 붉게 달구는 건 맞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수직 절벽 곳곳에 촘촘히 박힌 자주색 꽃송이가 눈부신 석양빛을 온몸으로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해안 전체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느 해 못지않게 다사다난했던 2018년 한 해도 이제 저물어갑니다. 12 월이면 많은 사람이 장엄하게 지는 해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겠다면서 서녘 바다를 찾습니다. 서해 3대 낙조 명소의 하나라는 솔섬 등이 있는 변산반도도 제법 찾는 이가 많습니다.<편집자주 : 기사는 2018년에 작성되었습니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로 시작하는 안도현 시인의 ‘모항으로 가는 길’이란 시가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문득 변산반도를 찾는 발걸음도 생겨났습니다. 시인은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 만에 제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라며 꼬드깁니다. 그러면서 변산해수욕장이나 모두가 꼽는 변산반도의 최고 비경인 채석강에는 잠 시만 머무르라고 짐짓 어깃장을 놓습니다.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그런데 수직 단애가 수천 권의 책을 켜 켜이 쌓은 것 같다는 채석강(彩石江)과 붉은색 암반 및 절벽으로 유명한 적벽 강(赤壁江) 등의 변산반도 해안 절벽은 지질학적 명승지일 뿐 아니라,특산식물인 변산향유의 유일한 자생지여서‘한 해 야생화 탐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꽃쟁이’들도 불러 모읍니다. 변산향유는 2012년 꽃향유와 가는잎향유, 애기향유, 좀향유 등 기존의 향유속 유사종과는 구별되는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나, 아직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오르지 않은 종입니다.

 

꽃향유(香油)는 줄기는 물론 가지 끝에 칫솔처럼 한쪽으로 뭉쳐서 피는 꽃이 아름답고 식물체 전체에 향기로운정유(精油)가 함유되어 있다 해서 그런이름을 얻었는데, 변산향유는 꽃향유를 닮았지만 분자생물학적 분석 결과몇몇 차이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먼저몸집이 꽃향유에 비해 작을 뿐 아니라,줄기가 녹색의 꽃향유와 달리 자주색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넓은 달걀형 또는 타원형으로 마주나는 잎도가죽처럼 두껍고 윤기가 나는 혁질(革質)이어서 초질(草質)인 꽃향유와 비교가 됩니다. 높이 30cm 안팎의 줄기나잎자루 등에 털이 전혀 없이 밋밋한 것도 큰 차이입니다. 자생지도 크게 다릅니다. 꽃향유는 전국 어디서나 숲 가장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변산향유는 변산반도 해안 절벽에서만 만날 수있습니다. 향유속 다른 유사종들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꽃이 피지만, 늦가을인 11월까지도 꽃을 볼 수 있어 앞서 언급했듯 ‘한해 마지막 꽃 탐사 대상’으로꽃쟁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Where is it?

변산에서 처음 발견된 꽃향유의 일종이라는 이름답게, 변산반도가 자생지다. 학명 중 종소명 byeonsanensis는 자생지가 바로 전북 변산임을 말해준다. 신종 발표 이후 추가 연구조사 결과가 없어 변산반도 이외 자생지는 알려진 바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자생지는 변산반도 안에서도 격포항 인근 해안 절벽이다. 10~11월 격포항 방파제 내 수직 절벽에 자생하는 변산향유는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그 외 지역은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 시각에 맞춰 찾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