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추억이 머무는 집이 그립다

 

박성권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추억이며, 집이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두 채씩이나 지은 얘기며, 대학시절 및 사회인으로 소위 ‘지옥고’라고 일컫는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의 삶을 통해 파란만장한 주거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어릴 적엔 초가집에 살았다. 대문은 고사하고 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재래식 변소는 볏짚으로 이어진 거적으로 변소 문을 대신했다. 바람 많은 동네라 쉽게 떨어져 나가는 거적으로 훵하니 뚫린 변소는 여름날이면 똥통에서 슬금슬금 나온 구더기가 용변을 보는 와중에 고무신 위로 기어 올라오면 지푸라기로 떨쳐버릴 수 있으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달려들면 대략 난감하여 용변을 그만 보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어린 동생은 그 곳에 빠져 식구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담벼락이나 초가집 지붕에 살다가 여름날이면, 가끔 서까래 밑으로 기어 다니는 구렁이도 함께 거주하는 집, 여름날이면 창호지를 대신하여 모기장으로 만든 방문과 창문을 통해 밤에는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낮에는 들판에서 올라오는 바람으로 시원한 여름을 보낸다. 2평 남짓 좁은 방에 일곱 식구가 서로의 체온으로 추운 겨울을 보낸 그 시절이 그립다. 소 마구간을 확장하여 지어진 아래채에서 새해 앞이면 연례행사처럼 쇠죽 끊이는 가마솥에 불을 지펴가면서, 5남매 가 한 명씩 들어가 일 년치 묵은 허물을 벗기는 엄마의 때밀 이 손길이 그립다.

 

시간이 흘러 흙으로 지어진 초가집은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었다. 첫 외부인인 집사람이 시집 온 이듬해, 그동안 온 식구가 정들었던 흙집을 허물고 아버지의 생각이 많이 고려된 설계안에 따라 집을 새로 지었다.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방 3개, 부엌, 수세식 화장실에 산과 들판으로 앞 뒤 탁 트인 전망을 가진 창문으로 이루어진 양옥집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좁은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서로의 체취를 느끼는 다정다감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핵가족 혹은 개인주의와 맞물려, 거주 문화에서도 각자 방에서 따로 생활하는 습관으로 옛집에서처럼 식구들의 숨 소리를 듣고 잠자는 게 마냥 그립기만 할까? 요즘 집이라는 게 편리함, 안락함, 개인방 등 물리적인 여러 가지 것들은 좋지만, 과거 옛집에서의 가족 간에 사랑과 끈끈한 정을 그리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껏 살면서 집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럽지만, 어느 여름에 한 채 짓고, 어느 겨울에 또 한 채를 지었다. 첫 번째 지은 집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지은 집이다. 조금 가파른 언덕에 위치하여 초등학교가 내려다보였다. 뒷동산을 등지고, 고개를 들면 눈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 저 너머 낙동강으로 이어져 있으니 정말 배산임수의 지형에 혼자만의 아지트였다. 수년 째 방치된 절개지 언덕에 두어 명 거주할 수 있는 0.5평 남짓 규모의 아지트로 며칠에 걸쳐 황토 흙을 파내고 다듬고 벽을 만들었다. 방바닥에 아카시아 잎을 깔고 한 여름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아카시아 가지로 지붕을 덮었다. 아카시아 나무 숲속에 100% 천연 황토 흙으로 둘러싸인 토굴은 지금 그 어떤 집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진 움막에서 홀로 머물거나 낮잠을 자거나, 심심하면 친구와 함께 찾기도 한다.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다니던 비탈진 언덕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학교를 마치면, 행복한 보금자리에 들르곤 했던 기억이 아른거린다.

 

두 번째로 지은 집은 겨울에 지은 것으로, 2평 남짓 둘레로 눈덩이를 쌓아 만든 집이다. 거의 눈이 오지 않는 남쪽이라 겨울에 내린 폭설이 사라지기 전에 남겨두려고 지은 집이다. 뒷동산에 자주 가는 놀이터이자, 오래된 큰 무덤이 있는 넓은 평지에 눈사람을 쌓아 만든 이글루 형태의 움막이다. 볏짚으로 바닥을 깔고 벽에 나무 가지를 걸치고 거적을 올 려 이글루와 몽고식 텐트를 합쳐 놓은 엉성한 모습이었다. 방학이라 낮 동안에 움막에 머무는 것도 모자라서,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늦은 밤까지 무덤가에서 무서워하면서 동생들이랑 친구들과 머물곤 했다. 영화 겨울왕국의 얼음궁전만큼이나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숲속에 지은 움막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이 사는 오두막처럼 온기와 행복은 훨씬 더 많았으리라.

 

군 제대하고 대학 3학년 복학 후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 하기 위해 집에서 대학으로 통학하기에 너무 멀어, 대학 인근 독서실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낮에는 학과 수업과 도서관, 밤에는 잠을 청하기 위해 독서실로 들어간다. 학생들이 모두 퇴실하면 잠을 자도 된다는 주인아저씨의 허락을 받은지라, 지친 몸을 달래는 잠자는 공간으로 밤마다 독서실에 둥지를 틀었다. 모두 퇴실한 늦은 밤, 독서실에서 홀로 책상 밑에 작은 스티로폼을 깔고 웅크리고 자는 생활로 두 번의 겨울과 여름을 보냈다. 샤워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이 없는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겨우 세면 정도 할 수밖에 없었고, 무더운 여름에 어디에서 어떻게 씻고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히 추운 겨울밤에는 석유난로가 꺼진 독서실 바닥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려면 몸이 얼어붙었다. 그 시절 후유증인지 오랜 세월 어깨 통풍으로 힘들었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장 가까운 곳에 얻은 단층집 옥상 일부에 지어진 옥탑방에서 살았다. 도로변에 접한 주인집 안방 겸 거실 옥상에 시멘트 블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기울지게 지어진 옥탑방이었다. 자동차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골목길에 주인 할머니 혼자 거주하는 집이었다. 작은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오르내리는 계단, 일어서면 머리가 부딪치는 낮은 천장, 옥탑방이라기보다 오히려 다락방에 가까운 형태였다. 어둡고 컴컴한 것은 차지하더라도, 변소 문을 열면 바로 행인들이 걸어 다니는 골목길에 맞닥뜨리는 도로변에 위치하여,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재래식 화장실이 문제였다.
 

겨울이면 옥상 다락방 바깥에 있는 세면용 수도꼭지는 얼어붙어 사용할 수 없었고, 싱크대는 고사하고 단지 잠만 잘 수 있는 다락방이었다. 보일러나 전기장판도 없는 다락방에서 세 번의 겨울과 여름을 보냈다. 화장실이 없어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회사나 인근 지하철역에서 급한 용변을 해결했다. 가끔은 새벽 무렵 뒷산으로 올라가 용변을 해결해야만 했던 그 다락방. 하지만 다니던 직장이 3교대 근무하는 제조회사라 회사에서 하루 세끼 식사를 해결하고, 현장 근로자 전용인 공장 안 목욕탕에서 아침저녁으로 샤워 겸 목욕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10여 년간 여러 지점으로 발령받아 옮겨 다니면서 나름대로 원룸을 구하는 기준을 세웠었다. 햇빛 잘 들고 창문을 열면 전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탁 트인 투룸이나 넓은 원룸에서 지낸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얻은 반 지하 투룸은 2~3층짜리 이웃집들과 담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통풍이 안될 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컴컴한 지하 원룸이다. 어쩌다 한줄기 햇빛을 마주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고 그제야 해가 뜬 낮인 줄 알아차린다.

힘껏 움직여도 흔들리지 않는 감옥의 창살 같은 방범창, 장마철 폭우로 인해 빗물이 넘쳐 방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방범창을 부수고 탈출할 수 있을 까 걱정이 된다. 혹은 불이 라도 나면 출입구 지하계단을 거쳐 대문으로 재빨리 피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바퀴벌레, 집게벌레, 지네만큼 많은 발을 가졌지만 훨씬 귀여운 신발이, 살짝 건드리면 죽은 척하면서 꼼짝하지 않는 작은 거미부터 몸에 비해 너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아나는 큰 거미까지 우린 한 식구다. 큰 바퀴벌레가 아니면 죽이지 않고 살짝 휴지로 잡아 바깥으로 내다버린다. 하지만 여전히 지하 원룸에 들어오면, 거실 전등을 켜자마자 두리번거리면서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은 끔찍한 바퀴벌레를 찾은 일이다. 지하의 눅눅한 습기로 인해 항상 보일러를 켜놓아도 며칠째 비 오는 날이면, 빨래줄에 걸쳐 놓은 수건은 마르지 않고, 벽면이며 방문에 군데군데 곰팡이 얼룩이 생긴다. 지금 살고 있는 지하 원룸의 이런저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독서실에서 둥지를 튼 2년과, 졸업 후 첫 직장 인근 다락방에서 3년간 생활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행복하다.

 

옛집에 대한 향수에서부터 어릴 적에 지은 움막을 거처 독서실, 다락방, 반 지하 원룸까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파란만장한 주거 환경에서 살면서 질 높은 주거보다 정말 힘든 것은 홀로 지내는 것이다. 한줄기 햇빛이 그리운 바퀴벌레가 사는 집에서 사는 건 그래도 살만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공간이 그립다. 넓은 공간이나 비싼 집에서 사는 것으로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공간과 물질에 압도되어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어릴 적 오두막 초가집 2평 남짓 방에서 일곱 식구가 서로 켜켜이 앉아 식사하고 부둥켜안고 잠자던 시절이 그립다. 더 나은 거주 환경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넓은 거주 공간, 혹은 각자 방으로 흩어져 함께 사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멀어진 만큼, 결국 서로의 사랑도 주고받지 못하고 관계도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박성권

20여 년간 수많은 전시회를 찾아다닌 결과, 미술 전공한 자녀를 두어 '청년예술가후원회' 준비 중입니다.

청년예술가의 지속적인 창작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일을 지향합니다. 청년예술가를 위한 아지트인 '레지던시'를 통해 지속적인 활동을 돕고자 합니다.

예술을 통해 시니어와 청년예술가 간에 세대 교류를 희망합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예술을 즐기는 세상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