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집’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시행한 공익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한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더함플러스협동조합과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노마드 탈출 작전

 

이양희


면사무소를 끝으로 이제부터는 가파른 산길이다. 자동차가 달릴 수 있도록 새로 포장된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지 만, 얼핏 보기에도 경사가 제법이다. 꼭 그 때문만이 아니라 천천히 걷고 싶은 마음에 면사무소의 너른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가기로 한다. 늦은 봄인데도 기온이 내가 사는 곳과는 보름 넘게 차이가 나는지 이제야 찔레가 한창이고, 올라가는 내내 이 꽃, 저 꽃, 봄꽃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타박타박 발끝을 보며 걸어가다 고개를 드니, 눈앞으로 울창한 나무들 이 가득한 높은 산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연초록이 아름답다.

이 길 끝 어딘가에 있을 친구 K의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한껏 들뜬다. K가 이 곳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처럼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랫 동네를 뒤로 하고, 한참을 고단하게 올라간 뒤 그 끝자락에 있었다. K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이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아마도 20여 년 간 20번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니, 평균 1년 남짓마다 이사했으리라. K 는 두 아이를 키우며 알뜰살뜰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조금 모아 놓으면 전세금도 함께 오르고, 오르는 전세금에 맞춰 또 모으고 대출 받아 빚지기를 반복하니, 서울에서 제 집 갖고 살기란 턱없는 바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메뚜기처럼 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는 삶이 불안하고 이사 오자마자 다음 이사를 걱정할 만큼, 그녀에게 주거와 정착은 커다란 숙제였다. 대신 이삿짐 싸기는 선수가 되었고, 살림 살이도 늘 새로운 집의 크기에 맞추어 들쑥날쑥, 버리고, 남 주고, 또 새로 사고, 그러다 보니 애착 가는 물건도 없단다.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온 도시를 점령할 듯 사방에 즐비하게 지어져도 그야말로 ‘그림의 떡’. 접근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주택소비자 반열에 들기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생각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마음과 머리를 맞대었다. 그래서 시작된 ‘도시를 버리고 떠나기’ 그리고 ‘함께 모여 살기’. 5명 이상 이주를 위한 논의와 준비가 시작되었다. 구성원 모집하기, 최소한의 비용을 모아서 땅 구입하기, 개별 주택 공간과 공동 공간 나누기, 함께 마을을 이루어 살기 위한 마을 규칙 합의하기, 실무 역할 나누기, 공동체 꿈 나누기 등. 그리고 드디어 오랜 산고 끝에 공사에 돌입, 길 만들고, 집 터 다지고, 전기와 물, 에너지 문제를 해결한 뒤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주자는 노마드에서 정착민이 되고 싶었던 바로 K네였다. 가족의 안정된 삶을 담아줄 집을 자신의 힘으로 ‘선물’하고 싶었던 K의 남편은 2년에 걸쳐 혼자 집을 지었다. 나무를 깎아서 손질하고, 황토를 개어 벽돌도 찍어내고, 물건을 정리해 낼 수납장들까지 그 모든 것을 희망과 꿈을 쌓듯 한 줄 한 줄 쌓아 올리고, 만들면서도 정말 힘든 줄 모르고 해내었다고 한다. K와 그녀의 두 딸도 틈틈이 함께 벽지도 바르고 집 짓는 재료를 나르면서 가족은 그 동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의미를 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한다. 그야 말로 ‘회복과 사랑으로 쌓아올린 집’이란다.

그 집의 설계는 가족이 모두 모여 서로가 필요한 공간을 이야기하고, 어떤 모양으로 할지, 문은 어디에 두고 기타 공간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소통하며, 쌓았다 허물었다 다시 바꾸기를 거듭하며, 모두가 만족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집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집을 짓는 일을 한 적 도, 한 번도 그와 같은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도전하는 용기와 서로에 대한 지지로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렇게 K는 노마드로서의 그녀의 삶을 정리하고 정착민이 될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 잡은 산 중턱 귀촌마을은 벌써 한 두 집씩 들어서더니 열집 가까이 지어졌다. 여건이 안 돼 아직도 터로만 남아있는 집까지 합치면 20여 가구의 집이 들어설 예정이며, 그들은 노년의 문턱에 선 자신들의 삶을 이처럼 작은 마을을 함께 만들어 새롭게 준비해내고 있다. 단독형의 집들도 있지만, 4가구가 공유하는 코하우징co-housing도 있고, 둘도 없는 친구들이 함께 이웃해서 집을 짓고 남은 삶을 매일 얼굴 보며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한 이들도 있고, 이런 저런 사연과 이유들을 함께 공유하며, 그들은 자신의 주거 문제를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능동적으로 해결하며 건강하게 삶의 전환을 이루어내고 있다.

 

사실 집은 그러해야 한다. 집은 곧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선택한 음식과 옷도 그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주지만, 집은 단순한 취향 차원을 넘는다.

우선 ‘어디에’라는 선택이 필요하다. 도시든 시골이든 살려고 하는 사람의 삶의 방향에 따라 선택은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집의 종류는 또 어떠한가. 아파트, 주택, 그도 아니면 다른 형태인가는 더욱 그 주인의 경향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우리는 대체로 어느 지역에서 어떤 형태의 주거를 선택해서 사는가를 보고, 대충 그가 지향하는 삶을 짐작해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거 선택은 그다지 선택지가 많지 않다. 특히 아파트형 주택이 도시 주거의 대표성을 띠다 보니, 이 집, 저 집 이름만 다르지 그 안의 구조는 별반 차이가 없어 그만 호기심조차 일지 않는다. 평수에 따라 공통되는 이 기묘한 주거방식은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름지기 집은 그 주인의 철학과 삶의 중심이 드러나 있어야 제 맛이다. 말하자면 삶의 관계 방식이 그들의 공간에 자연스레 표현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리를 즐겨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이웃과 소통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방의 구조가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목공에 취미가 있는 주인의 집에는 한 켠에 목공 작업실이 자리하고, 책 읽는 주인은 서향이 느껴지는 공간에 남다른 안목으로 중심을 두게 될 것이다. 마당의 텃밭이나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사는 사람의 내면이 보여 지는 공간이 바로 집이다. 즉, 사는 이의 철학이 집을 선택하게 된다.

친구 K는 그렇게 멋지게 해결했다. 자신의 손으로 사는 이들의 필요공간을 퍼즐처럼 맞춰서 놀이공간같은 집을 짓고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함께 나눌 이웃을 또 다른 가족으로 맞이하면서.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의 삶에도 그 한가운데 ‘집’이 있었다. 마당 너른 시골의 집을 떠나 서울로 이사 올 때 시골집 대문 앞에 달아놓았던 아버지의 문패도 함께 올라왔다. 그리고는 변두리 허름한 집을 옮겨 다닐 때도 늘 그 문패는 여지 없이 대문 기둥 옆에 제일 먼저 걸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는 작은 빌라 집의 대출금을 갚으시느라 늦은 나이 까지 일을 하셔야만 했다. 아버지에게 집은 투자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였다. 그러기에 반드시 집이 있어야 했다. 가족에 대한 당신의 책임은 바로 “내집”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었기에 그토록 집착하셨다.

 

나는 아주 일찌감치 서울살이를 포기했다. 새로 쌓는 담장의 1센티를 두고 넘어 왔느니 갔느니 사생결단하듯 싸우는 옆집 사람들, 눈뜨면 사방이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푸른 하늘 한 자락이라도 볼라치면, 일부러 고개를 기린처럼 빼어 내고 올려다보던 나의 신혼집에서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아파트 청약에 온 꿈을 담아 ‘내집마련’의 긴 대열에 합류할 자신도 없었고, 이웃조차 알기 어려운 도시의 삶이 불안하고 허전했다. 무언가 전환이 필요했다. 그리고 용기와 결단이 뒤따라야 했다.
귀농을 위해 3년간 지역도 탐색하고 귀농학교도 다녀보고 전환을 모색하며 준비했으나, 결국 단계적인 적응을 위해 귀촌으로 결론짓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뒤로는 숲길을 품고 있는 산이 있고 사방 어디서든 하늘이 들어와 있고, 시원한 바람이 잘 통하는 전셋집을 구했다. 집 앞으로 조금만 나서면 논밭이 펼쳐져 모내고 난 뒤, 초여름 밤이면 개구리 떼창 소리에 잠들고, 맹꽁이 소리, 귀뚜라미 소리, 그리고 차 소리와 차 빼라는 고함소리에 아침 단잠을 깨던 서울과는 달리 창가에 모여든 새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을 맞이하는 기쁨이 있다.

생전 처음 가져본 마당에는 봄꽃과 여름 나무 그늘, 가을 단풍진 잎들의 넉넉함과 함께, 겨울이면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어느새 잃어버린 계절을 찾아주었다. 이 안에서 우리의 생활 리듬도 달라지기 시작했고, 삶의 주제가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생태, 환경, 공존, 생명, 살림 등.

삶의 실천 가치가 확장되면서 생활의 고민도 달라졌다. 플라스틱 사용 안하기, 퇴비를 만들고 땅을 일구어 텃밭 농사 시작하기, 벌레와 친해지기, 장 담그기, 유리알 햇살에 각종 가을걷이 말리기, 천연 양념만들기, 김장하기, 자연물로 염색해서 옷 지어 입기, 그리고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한 에너지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소비하던 삶이 가능한 한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삶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살이를 접은 지 17년이 되었고, 이제는 누구네 집에 누가 새로 이사를 왔는지, 이장은 누가하는 게 좋은지, 마을살이가 어찌하면 좋을지 모여서 의논하고, 앞집에서 비 오는 날 부침개 부쳤다고 너도나도 모이고, 대보름날이면 마을에서 달집을 만들어 태우고, 나는 장구매고 나서서 북치고 장구치고 신명하게 길놀이로 한 해를 열며, 꿈과 소망을 담아 하늘 높이 풍등을 올린다. 비록 오래된 자연 부락의 정식 부락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며가며 인사하고 동네일에 참견도 하며, 궂은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맡아가며 마을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아직 내 집이 없다. 여전히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꼭 이 마을이 아니어도 그 곳이 어디든 또 누구와 살게 되든, 함께 모여 삶을 나누는 나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기에.
 

 

이양희

서울을 떠난 지 18년째 시골살이에 맛들여 지내다.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꿈꾸며 농사 지어 먹고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가며 반 자급 생활의 소박한 자족을 즐기며 살고 있다.

잡다한 것들에 관심이 많고, 요즘은 특히 원하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이웃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골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