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지붕도 없이, 보호자 없이

한 여자가, 젊은 여자가 얼어붙은 포도밭 도랑에서 죽었다. 낡은 요 하나를 둘둘 말고 꽁꽁 얼어 죽었다. 생명의 푸른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골 겨울 벌판, 포도덩굴을 태우는 연기가 솟아나는 후미진 곳에서. 영화 <방랑자>는 나무토막처럼 죽어있는 여자의 얼굴로 시작된다. 아녜스 바르다의 이 영화는 1985년에 만들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모나. 그녀가 새로 지은 이름이다. 프랑스 원제목은 ‘법도 지붕도 없이(Sans toit ni loi)’이고 영어로는 방랑자. 베가본드Vagabond.

 

방랑자 모나. 담요 하나 텐트 하나 짊어지고 단독자로 여행한다. <이미지 출처 : imdb>

 

한국어제목 ‘방랑자’가 주는 아련하고 자유로운 느낌은 영화가 다 끝나도록 거의 없다. 모나에게는 ‘여행하는 젊은 여자’라고 일컬어질 때 풍기는 긍정적 이미지는 하나도 없다. 다소곳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소박하지도 않다. 해진 텐트 하나를 짊어지고 여행을 다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행의 어떤 다정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전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 그 흔한 ‘자아 찾기’도 하지 않고 그 흔한 ‘깨달음’ 같은 성찰 한 오라기도 끌어오지 않는다. 모나는 풀밭에서 돌처럼 굳은 빵을 씹다 못 먹고 아무 차나 세워 타고 저물면 길가에 텐트를 치고 입은 옷 그대로 잠든다. 눈 뜨면 남의 집 수도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정처 없이 걸어 다닌다. 담배를 얻어 피우고 술도 얻어 마시고 심지어는 마약을 얻으려고 부랑자들과 어울린다. 길에서 만난 남자와 얻을 것이 있으면 잠을 자고 종종 성희롱과 성폭력도 당한다.

 

방랑자의 모나. 한겨울 길 가에서 돌덩이같은 빵을 먹으며 여행하는 베가본드. <이미지 출처 : imdb>

 

스쳐가는 모나를 겪은 제각각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녀는 이기적이고 버릇없고 술에 절어 아무렇게나 사는 여자일 뿐이다. 꿈도 없고 계획도 없고 어떤 비전도 없는 이상한 여자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행은 프랑스 시골마을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게 기억된다. 특히 남자들에게 모나는 보호자 없는 여자, 건드려볼까 싶은 쉬운 여자가 된다. 게으르고 더럽고 가난하고 제멋대로인 여자, 보살펴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모나는 사람들에게서 애정을 받지 못하고 겨울 개울가로 떠밀려간다.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영 없는 건 아니다) 사랑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이상한 여행자 모나는 그래서 그렇게 죽어도 싼 여자가 되어 딱딱하게 굳은 채 무연고자, 객사자를 넣는 비닐봉투에 넣어진다. 생전에 모나를 잘 웃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본 유일한 한 사람은 늙고 병들고 ‘앞을 잘 못 보는’ 할머니뿐이었다.

 

방랑자 모나의 마지막 여행. 법도 없이 지붕도 없이 혼자 여행하는 모나는 죽었으나. <이미지 출처 : imdb>

 

<방랑자>를 처음 보던 오래전 봄날, 이십대나 삼십대, 사십대의 여자들과 함께 봤었다. 우리들은 거의 모두 모나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혐오의 시선에 포위된 젊은 여자가 절대 반성 따위 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끈끈한 남자들의 시선을 가볍게 벗어나는 무모하고 위험한 행보는 말할 수 없이 기묘한 해방감을 주었으니까. 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실제 길에서 얼어 죽은 여자에 대한 기사를 읽고 몰인정한 세상의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보살핌 없이 죽어간 여자가 가엾어서 <방랑자>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여자들은 일부러 영화를 오독하고 오해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는 ‘저러니 죽어도 싸다’고 말할지라도 저렇게 생겨먹은 여자여행자는 처음 봤으므로.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 모나의 여행을 무한한 탈주로 보기로 했다. 개울가에 쓰러져 죽더라도, 완전히 몰락하더라도 ‘내 삶은 내가 살고 내 길은 내가 간다’는 의지에 찬 모나의 발걸음에 우리는 뻐근한 해방의 박수를 쳤다.

 

여행에는 상수도 하수도 있을 수 없어

올바르고 환하고 진지한 여자의 여행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건너가자, 건너가 보자며 나를 찾아(I ) 나(I )로 시작하는 세 나라(이탈리아, 인디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훌륭한 여자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4,285km,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THE PACIFIC CREST TRAIL)을 혼자 걸으며 새 삶을 향해 발가락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진지하게 여행하는 <와일드(Wild)>. 부서진 사랑과 깨진 관계를 슬퍼하다가 떠난 여행에서 진짜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가는 <투스카나의 태양>.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눈부시게 다시 태어나는 수많은 여행자 여성 이야기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저 벌판에서 얼어 죽은 여자 모나가 텅 빈 길을 걸어가는 모양이나, 차를 잡는 모습, 낡은 텐트 옆에서 덜덜 떨며 통조림을 먹는 모나의 모습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모나가 온전히 자신만의 여행을 선택했다는 이유일 것이다. 법도 없이, 지붕도 없이, 보호자도 없이, 그냥 단독자로서 여행하는 그 태도를 지금도 마음 깊이 경외하고 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간으로도 웃는 법을 배워가는 여자. i로 시작하는 나라들로 나를 찾아간다. <이미지 출처 : imdb>
 

와일드. 몇 천 킬로미터를 혼자 걸어가는 여자. 삶을 온전히 바꾸는 여행이다. <이미지 출처 : imdb>

 

얼마 전, 여행자 여자들을 만났다. 스무 살 즈음에 혼자서 아프리카 몇 개국을 수개 월 여행하고 살다가 온 여자, 남미로 중동으로 몇 달 동안 혼자 다니며 살다온 여자, 인도 아쉬람을 다니며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온 여자. 감히 아직 나로서는 상상만 해온 방식으로 이 여자들은 멋있게 여행했다. 이들은 단독자로서 자기가 선택한 곳으로 원하는 날만큼 자기만의 방식대로 여행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냈는데 어이없게도 이 여자들의 여행에 대해 수없이 많은 혐오의 말과 모욕의 언설이, 지루한 훈계가 몇 년 동안 이어졌다는 거였다. 혼자인 젊은 여자, 보호자 없는 여자, 자유로운 여자, 아무렇게나 돈을 쓰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이유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혼자 왜 결혼도 안하고 여행을 다니는 거지. 흔한 물음을 받는다. <이미지 출처 : imdb>

 

여행하는 여자들이 밉고 싫은 것은 시기와 질투로부터 왔을 것이다. 함부로 돈을 쓰고 사치스럽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처벌하고 싶었을 것이다. 홀로 충만한 여성을 가족이나 책임져야 할 관계를 저버린 파렴치하고 몰상식하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간주해 비난을 해야 속이 풀리는 비틀린 열등감을 폭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성들이 자유롭게 배낭하나 짊어지고 노숙이라도 괜찮다며 자유롭게 떠도는 것이 진정한 여행으로, 용기 가득 찬 여행으로 추앙받는 반대편에 여성의 여행이 있다. 노숙을 하거나 무전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불행을 자초했다고 욕을 먹는다. 등산을 하고 싶어 동호회라도 들라치면 이미 그 세상에서 여자는 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남자나 사귀러 들어온 헤픈 여자로 간주한다. 혼자 산에 가서 쉬노라면 산짐승보다 무서운 남자를 만나 죽을 공산이 커서 혼자는 산에 가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 많은 날 조금 낮은 산에 가면서 숨을 고르노라면 산악등반을 주로 하는 남자로부터 ‘이건 산에도 못 드는 곳’이고 ‘등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인데 힘들어한다고 조롱받는다. 해외여행을 간다면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넋 빠진 여자로 치부되고 비싼 곳에 머물면 그것 또한 돈 자랑 하는 게 된다. 미술관 기행이나 역사기행을 떠나면 잘난 체 허세 떠는 게 되고 오지를 탐험하면 민폐를 끼치는 게 되고 행여 여행지에서 사람을 사귀거나 연애하면 외국인을 좋아하는 걸레라고 단언한다.

 

그 여자들 모두 자기 여행의 철학자들

여행의 상수가 따로 있고 여행의 하수가 어디 있나. 여행을 떠나려는 여자가 제 몸만 한 배낭을 짊어지든 손바닥만 한 핸드백 하나 둘러매든 여행의 주인공에게 함부로 입 열어 여행의 덕목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 눈 있는 자라고 다 올바로 보진 못하니까. 그러니 여성의 안전한 여행을 위한 십계명을 정해준다면서 밤늦게 혼자서 낯선 거리를 돌아다니지 마라, 이슬람권 국가나 인도에서는 옷차림을 조심하라, 확실하게 노, 라고 말하라, 호루라기를 가지고 다녀라, 블라블라블라, 떠들지 말아주기를. 네 발 가진 인간이, 내 의지를 가진 여자가 어디를 못 가겠나.

똑같은 여행이 여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정반대로 해석되는 걸 오래, 많이 봐왔다. 어떤 방식으로 여행하든, 그 여자에게는 그 여자만의 이유가 있다. 어떤 한 시기를 지나가고 살아갈 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당신들의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할 뿐인 터무니없는 시기와 질투와 훈계를 이제 그만 멈추라고, 나는 위엄을 갖추고 단호하게 말하려고 한다. 그 여자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두라고.

 

와일드. 저 짐을 지고 일어나지도 못했던 여자가 포터 없이 보호자 없이 완성하는 트레일 길.  <이미지 출처 : imdb>

 

12월이 되면, 나는 한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고 보살피고 챙기고 살림하고 애쓰며 산 나에게 선물로 여행을 줄 것이다. 한겨울의 한국에서 한여름의 휴양지로 떠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쉬면서 호텔방에서 영화나 볼 것이고 개구리처럼 얼굴을 내밀고 리조트 수영장에서 헤드업 평영으로 유영할 것이다. 한 해 동안 작별한 죽은 사람을 애도하겠지만 잘 먹고 푹 잘 것이다. 행여 그런 곳에서 모나의 거친 여행과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리는 게 모순일지라도 내 여행은 오로지 내 여행이 될 것이다. whatever happens 천하없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