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주말이면 찾아오던 디즈니 세상 속에서 나는 마음껏 행복했었다.

팅커벨이 지팡이로 빛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면 환상의 나라, 미래의 나라, 모험의 나라, 개척의 나라가 펼쳐지고 콧수염의 월트 디즈니가 인자한 표정으로 그날의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그중에서도 <메리 포핀스>는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든 영화로 언제 보아도 처음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과 신기함을 기억나게 해주곤 한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608

 

몇 년 전 디즈니 사에서 제작한 <메리 포핀스>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영화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가 나왔을 때 잔뜩 기대를 하고 보았다.

영화 속에서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두 딸이 재미있게 읽은 『메리 포핀스』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딸들에게 약속을 한다. 하지만 『메리 포핀스』의 작가 트래버스 부인은 〈미키 마우스〉 같은 만화영화를 만드는 디즈니에게 자기 소설을 맡겨 우스꽝스러운 영화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노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메리 포핀스』를 향한 디즈니 사의 러브콜은 이후 20년이나 이어지는데 그사이 여러 사정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 트래버스 부인이 못 이기는 척 디즈니 사의 방문 요청을 수락한다. 트래버스 부인이 온갖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제작자를 힘들게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메리 포핀스』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8292

 

영화 속엔 여러 아버지가 등장한다.

헬렌(트래버스 부인의 이름)의 아버지는 유쾌했다. 어린 시절의 팍팍한 생활은 아버지가 상상력을 불어넣어주면 마법에라도 걸린 듯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제 삶은 적응하지 못하는 은행원이었고 알코올중독자였다.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평생 헬렌을 붙잡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의 아버지는 혹독했다. 신문배급소를 운영하며 인건비를 아끼려고 여덟 살 아들에게 신문배달을 시켰다. 아들은 어깨까지 눈이 쌓이는 추운 겨울날에도 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배달을 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면 여지없이 가죽 허리띠를 풀어 매질을 했다.

월트 디즈니는 요즘 말로 딸바보였다. 딸들이 좋아하는 『메리 포핀스』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20년 넘게 지키려 애써왔으며 간직해오고 있었다.

“전 절대로 제 딸들에게 한 약속을 무른 적이 없어요. 아빠란 그런 거죠.”

트래버스 부인이 미국 체류 시 전담 운전기사였던 랄프는 날씨에 민감한 아버지였다. 그에게 맑은 날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애를 가져 휠체어를 타는 딸이 비라도 오는 날엔 정원 외출조차 어렵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4개월 정도를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지병이 있던 데다가 갑자기 자리에 눕게 되면서 누군가 전적으로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간병인을 구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연로하신 엄마가 감당해야 했는데 자식들이 도와도 가정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막투석 중이라 들어갈 수 있는 요양원이 제한적이었는데 마침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서 가능하다고 하여 내가 사는 동네로 모시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워 자주 드나들다 보니 아버지랑 얘기할 기회도 생겨났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늘 엄마 뒤에 계셨다. 친정엘 가도 엄마랑 주로 얘길 했지 아버지랑 따로 얘기를 나누게 되진 않았다. 또 전화를 하여 당신이 직접 받으셨을 때도 인사만 나누면 바로 엄마를 바꿔주시곤 했다.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 아니셨음에도 딸들과의 대화를 즐기진 않으셨다. 그런데 엄마가 없는 공간, 나와 아버지만이 있는 공간에서 뭐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이런저런 옛날얘기를 함께 나누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스무 살 대학생 때 전쟁을 맞았던 아버지, 엄마와 연애를 하던 아버지, 다섯 자식을 거느리게 된 아버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 그 사이사이의 여린 갈피를 살피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식민지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고 월남하여 고단한 삶을 살았던 한 남자가 보였다. 부끄러움이 많고 내향적인 한 남자가 힘들게 감당했을 가장의 무게도. 요양원에 계신 그 시간 동안 아버지 전부를 알았다고도, 이해했다고도 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그 시간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영화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 중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78292#888181>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의 영화 수다 방식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지만 영화 속에서 주제를 선정하여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눈 얘기가 ‘아버지와 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빠가 무척 자상했어요. 겨울에 우리가 집을 나설 때면 난로 가에서 신발을 데워서 내어주셨어요. 오래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자주 생각이 나고 그리워요.

“아버지랑 데면데면했어요. 돌아가신 지 여러 해 되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얘길 꺼내니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싶어졌어요.”

“아버지랑 각별했어요. 딸이 여럿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날 많이 예뻐해 주셔서 그 기대를 채우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전에 중년의 독서모임이 왜 필요한가를 피력한 적이 있다. 책을 통한 소통, 관계에 방점을 두었는데, 내가 활동하는 커뮤니티도 닮아있다. 영화를 보고 주제를 정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 물론 자신이 내어놓고 싶은 정도로만. 그 시간을 통해 예전의 추억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감정선 하나가 툭 건드려져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는 영화 속 인물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그땐 몰랐고 지금은 알고 있는 것들을 깨닫기도 한다.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실제로 트래버스 부인의 육성을 녹음해놓은 테이프가 돌아간다. 그처럼 나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요양원에서 녹음해두었던 아버지의 육성을 핸드폰을 통해 들어본다. 연세가 들고 병으로 거칠어졌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청년 적 기억이 담긴 목소리를. 그때 아버지는 머릿속에 고향을 그리며 추억 여행을 하셨을 테지…. 아버지, 잘 잘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