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본다.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 누군가는 설레겠지만, 난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행기에 실려 이별하는 사람은 뻥 뚫린 가슴으로 아파할 거라는 아련한 슬픔이 습관처럼 배어있다. 감당할 수 없는 지상과 하늘의 거리감이 이별을 처연히 받아들이게 한다.

하늘을 보며 가슴 아파한 사람이 나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울 엄마도 그랬단다. ‘누군가를 태워 떠나는 비행기. 누군가 아픈 이별을 하는구나’라며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를 멍하게 쳐다본단다.

지금과는 다른 1990년대 유학길 이별 에피소드가 남긴 습성이다. 원고지 쓰고, 손편지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시대였으니, 비행기 타고 가는 것은 엄청난 이별을 실감 나게 하는 의식과도 같았던 때였으니까.

같은 하늘 아래, 머나먼 곳에서 엄마와 딸은 아파했다.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모녀의 사랑은 행복이라기보다는 아픔에 가까운 그리움이었다. 그때 이후, 하늘을 보면 가슴이 아려오는 고통을 체할 듯이 꾸역꾸역 삼키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사랑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로테스크하다 못해 어이없어 헛웃음을 짓게 하는 프랑스 천재 작가 ‘로맹 가리’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애잔하고도 강력한 사랑. 떼어낼 수 없는 팔다리처럼 거부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마침내 아들을 프랑스 대표 작가로 만든 것이다.

필명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쓴 자서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은 지긋지긋한 어머니의 사랑을 고발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어머니를 묘사하고 있다. 또 다른 필명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받은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의 필요성을 기막히게 설득하고 있다.

단 한 명에게만 수여 한다는 콩쿠르상을 두 개의 필명으로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수상한 이례적인 해프닝을 남긴 작가. <자기 앞의 생>으로 수상한 ‘에밀 아자르’가 끝끝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파문을 일으켰지만, <하늘의 뿌리>라는 소설로 콩쿠르상을 이미 수상한 ‘로맹 가리’였음을 유서로 밝힌 충격적인 작가. 내면에 있는 수많은 자아를 한 개의 필명으로 표현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본명은 로만 카체프(1914~1980년).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유대인으로 그 당시 프랑스 사회에 스며들기 어려운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외교관, 전투기 조종사, 영화감독이 된다. 주문처럼 아들에게 요구했던 하늘 같은 어머니의 소원이자 흔적이다.

 

  <새벽의 약속> (사진 출처 : 문학과 지성사)

 

 

“끝났다”로 시작해서 “살아냈다”로 마치는 소설, <새벽의 약속>. 어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아들의 물리적인 관계는 “끝났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적인 관계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그림자는 아들의 삶을 지배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말했던 그 삶을 “살아냈다”. 이 소설은 동일한 제목으로 2017년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로맹 가리의 어머니. 터무니없는 기대와 희망을 거침없이 집요하게 아들에게 각인시켰다. 남편이 누군지도 모른 채 홀로 어머니가 되어, 어린 아들에게 부여한 일방적인 명령 같은 약속. 그 새벽의 약속을 아들은 지킨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를 자기 인생의 스포일러(spoiler)가 되게 했다.

 

 

  <자기 앞의 생> (사진 출처 : 예스24)

 

 

“사랑해야 한다”로 끝나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60대 로자 아줌마와 10대 소년 모모의 아름답고도 아픈 삶 이야기다.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국 초연으로 연극 무대에 올려졌다. 로자와 모모는 가족도 아닌 그야말로 프랑스 빈민가에 버려진 계층의 남남이다. 그러나 가족보다 더 진하게, 위험하리만큼 더 가깝게 유일한 ‘내 편’이 되어 사랑한다. 그 사랑이 그들을 존재하게 한다.

가족 같은 타인이든, 타인 같은 가족이든 사랑할 사람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제도, 종교, 인종, 나이, 성별에 속박된 사랑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가치를 통쾌하게 일깨운다. 사랑 없이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래서 작가는 모모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외친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고.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우화가 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가 추위를 견디다 못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의 가시는 서로를 아프게 찔렀다. 아픔을 견디다 못해 다시 떨어졌지만, 또다시 추위를 견디지 못해 다시 뭉쳐야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

가시가 아프게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온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사랑! 쉽지 않다. 가족! 역시 만만한 주제는 아니다. 사랑과 가족, 단순한 줄 알았는데 늘 복잡한 상황을 안고서 다가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화하며 어려워진다.

떨어져 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애잔한 사랑이 있고, 가까이 있어 가슴 아파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애끓는 사랑도 있다. 떠나보내는 사랑이 있고, 곁에서 지켜주는 사랑이 있다. 제각기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사랑을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하늘 아래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