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의 시간 활용법: 일상의 큐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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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했던 비대면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동안의 습관이 뒤죽박죽되었다.

자동으로, 당연한 줄 알았던 일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리 지어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50+세대에게는 인구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늘 ‘우리’가 개인을 앞섰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이들의 관행이었다.

 

무리는 개인보다 힘이 세다. 약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도 어쩌면 무리에 속한 이가 많았기에 그 밖의 것은 보이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나왔던 것들이 다른 현상을 겪으면서 잠깐이면 될 줄 알았던 시간과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멘붕’으로 여겨지던 일들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적응 중이다. 무리의 개체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건 어쨌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사람들에게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있지만, 누군가와 지냈던 일이 많았던 이들에게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다. 재앙이고 고통이다.

사실 필자는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는 걸 아주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다. 성향으로 보나, 예전부터 해왔던 일로 보나 개인 생활에 익숙했던 터였다. 게다가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라는 건 줄어들게 마련이니까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라 여겼다.

 

 

 

 

 

 

 

 

그러나 6월 초, 수강 중이거나 새로 신청한 교육 프로그램이 속속 다시 취소되는 등 2차 방역이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무슨 일이든 짧은 시간은 스쳐 지나가지만, 길어지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외’라는 말은 시간 주기가 상대적으로 짧을 때 성립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쁜 일이 잠깐만 일어나면 잊히기 쉽지만, 자주 반복될수록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그렇게 해서 남은 시간까지 좀먹는다는 사실이 되새겨진다.

 

이렇게 최소한의 일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혼자만의 시간 속에 놓였다.

직장인들이 출퇴근하는 시간에 필자는 다른 활동을 하면서 지냈기에 의식하지 못했을 뿐, 모든 것이 차단되는 비대면의 시간은 서서히 숨통을 조였다. 고산에서 산소 부족을 느끼는 고산증의 증세 같은 거였다.

앞에 놓인 시간은 완전히 자유였지만, 단절된다는 의미에서는 막막한 진공상태에 놓이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철학적 개념으로 쓰이던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개인의 일상으로 틈입하자 필자는 거리 두기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거리 두고 바라보게 되었을 때의 낯섦과 당혹스러움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다.

일상의 균열로 안절부절못하는, 이전과 다른 나 자신과 잘 지내야 했다.

그전의 시간 길이로는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들이 긴 시간 속에 민낯을 드러내면서 그에 맞는 방식으로 대면해야 했다.

실내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에 대응하는 마음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내면의 무수한 감정과 대면하는 일은 비대면을 권하는 사회가 가져온 일차적이면서 근본적인 변화였다.

 

설상가상으로 혼자만의 시간에 즐겼던 하이킹까지 무릎 부상으로 제약을 입게 되자 그 변화가 배로 실감되었다.

사회적 차원과는 별개일 수도 있는 개인 사고와 맞물려서 느끼게 되는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 누구나 다른 이의 큰 질병보다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위급할 것이다.

무릎 부상 같은 건 눈여겨본 적도 없다가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자 다리의 소중함이 극적으로 다가오고, 통증이 느껴지니 고통스럽고, 당연하던 하이킹을 못 해 몸이 무거워지는 데 따른 우울증이 엄습했다. 다리 하나로 인한 생각이 과도한 감은 있을지라도, 어디로도 분산시키지 못하는 집중된 의식이란 건 어마어마했다.

 

 

 

 

 

 

 

 

대면과 비대면의 대조를 통해 보이는 필자의 모습은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신체 변화가 ‘거리 두기’를 통해 다시금 조명된 모습…. 우리의 내면은 기실 모든 인간이 가진 것들, 우주의 구성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그동안은 그것들을 따로 의식할 일이 없었다.

다른 바깥의 일들이 많으니까. 계기라는 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전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거기 서 있게 된다. 그럴 때 다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이 하나의 단서처럼 다가왔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데이터로 축적된다. 무수히 많은 일이 어느 때를 기점으로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 이후로는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내 안의 빅데이터가 '정체성'으로 표현되고, 거기에 맞춰 저절로 살아졌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다. 현재만 잘 살면 미래는 좋아지게 돼 있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현재의 역할이고, 해석을 잘하면 지금이 좋은 거다. 미래 역시 생각으로만 존재할 뿐 현재의 연속물로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지금이 좋으면 미래는 좋을 수밖에 없다.

현재가 좋으면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좋아진다.

 

무릎 부상으로 절뚝거리면서 걷는 사이, 그간의 습관이 보였다.

아프지 않도록 천천히 걷다 보니 새로운 습관이 어떻게 자라날 건지 예측도 되었다.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하나도 당연해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행동이 저절로 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분절의 행동이 연습되었던 것일까? 무지해서 지나쳤던 일들을 하나하나 마음으로 인식하는 사이, 흔히 말하는 빅데이터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들이 함께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예전과는 다르게, 스쳐 지났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큐레이팅하며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갈 때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개인은 집단 속에서 개체(個體)와 계통(系統) 간 발생과 반복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는 현재를 서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