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포털 필진 이현신님이 지난 여행을 되돌아보며 작성한 글입니다.

 

여행 15일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이제 고산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에 이르기까지 어느 도시에나 아르마스라는 이름의 광장이 있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생각했고, 나중엔 의아했다. 같은 이름의 광장을 중심으로 관공서와 성당, 박물관 같은 유적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아르마’는 무기라는 뜻이었다. 무기고가 있는 곳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거나, 도시의 중심에 무기고를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늘은 쨍 소리가 날 것처럼 맑았고 햇볕은 따가웠다. 거리 화가의 그림에서도 웅장하고 환상적인 남미 자연을 엿볼 수 있었다. 색상이 밝을뿐만 아니라 현란하기 그지없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광장을 둘러보자.

 

아르마스 광장의 거리 화가 그림

 

대통령 궁 앞에 걸려 있는, 바람에 펄럭이는 국기의 크기에 압도당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큰 태극기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광장에서 뻗어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초록이 무성한 가로수와 맑은 물이 솟는 분수를 끼고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고, 공기 중에는 꽃향기와 생기와 낭만이 넘쳐흘렀다. 산뜻하고 청량하게 목을 넘어가는 생맥주를 마시며 파라솔 밑에 앉아서 산들바람을 맞고 있자니 그냥 이곳에 눌러앉고 싶었다. 남미는 정세가 불안정하고 치안이 좋지 않고 경제 사정도 나쁘다는 소문과 달리 여유롭기만 했다.

 


웬만한 건물 크기의 칠레 국기

 

와이너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수백 종의 와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삼천 원짜리부터 고가의 와인까지. 삼사만 원만 주면 아주 훌륭한 고급 와인을 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3배 이상 줘야 한다. 수출하는 와인에는 적도를 넘는 동안 맛이 변하지 않도록 모종의 처리를 한다고 하니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마실 수 있는 만큼 많이 마시자.

 


수백 종의 와인이 가득한 와이너리


산티아고 근교에 있는 발파라이소에는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가 세 번째 아내 마틸데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집이 있다. 급경사지에 지은 집이라 제일 아래쪽에 정원이 있고 침실은 4층에 있다. 파블로 네루다는 필명인데(아버지가 시인이 되는 걸 반대했기 때문에) 나중에 본명이 되었다. 파시즘에 대항해 공산주의자가 되었지만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건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3년 9월 23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시인과 나(촬영이 허용되는 서재에서)
   

기념관에는 네루다가 생전에 사용했던 가구를 비롯해 그의 물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네루다는 이 집을 지을 때 전망이 좋을 것, 중심가 접근이 용이하도록 교통이 편리할 것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고, 세바스티아나라는 건축가가 네루다의 요구대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념관 이름은 건축가의 이름을 딴 ‘무제오 세바스티아나’다.
일행 중 박물관 안에 들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대부분 정원만 구경하고 버스로 갔다. 남미 소설이나 시는 번역이 많이 되지 않은 까닭에 친근하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한다. 시인의 시집을 비롯한 기념품을 사고 싶었으나 현지인 가이드가 찾으러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사지 못해 아쉬웠다.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아 침실 창밖으로 보이는 발파라이소 항구의 전경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전망 좋은 방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바다를 보면 시상이 저절로 떠오르지 않을까.

 


네루다의 침실에서 본 발파라이소 항구


발파라이소 시가지는 해안에 면한 구릉의 비탈면에 자리하고 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남미 최대 항구였으나 운하 개통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낮은 지대에 상가와 사무실이 있고 높은 지대는 주택 단지다. 네루다의 집도 언덕 꼭대기에 있다. 도시에 활력을 주고자 1980년대 중반 산동네 집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모든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담장의 그림들

 

해변으로 내려오면 백사장이 넓은 해수욕장이 있다. 해가 비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 가족 단위의 피서객이라고 한다. 고무 튜브나 보트는 보이지 않았다.

 


흐린 날씨에도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귀족의 고택 같은 식당이 나온다. 샌드위치나 과일로 한 끼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한 번쯤 호사를 누리는 것도 여행의 묘미 아닐까? 현지 가이드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 네루다의 시심을 자극했던 바다를 보며 해산물 요리를 먹어보자. 시상이 마구마구 떠오를지도 모른다. 연어 스테이크를 비롯한 모든 요리가 맛이 있었다. 빠뜨리면 안 되는 건? 물론 화이트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 해산물 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