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고 지내는 한 70대 부부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50평대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이었어요. 자녀 셋을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은 두 분만 사십니다이분들의 하루를 한번 따라가 볼까요? 


아침에 안방에서 일어나, 거실 소파로 나와 TV를 켜고, 점심을 차려 드신 뒤 다시 소파에 앉습니다. 저녁이 되면 안방으로 돌아가 주무세요. 안방, 거실, 주방. 하루의 동선이 이 세 곳에서 끝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 세 개는 어떻게 됐을까요? 일 년에 몇 번, 명절에 자녀들이 다녀갈 때만 문이 열립니다. 평소에는 닫혀 있고, 겨울이면 난방비를 아끼려고 그 방들의 보일러 밸브를 잠가두십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이 부부는 몇 평짜리 집에 사는 걸까요?


등기부에는 분명히 50평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고 있는' 평수를 세어보면 15평 남짓이에요. 나머지 35평은 청소하고, 환기시키고, 매달 관리비와 난방비를 내야 하는 '관리의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식구가 다섯이던 시절과 똑같은 비용이, 두 사람만 남은 지금도 그대로 나가는 거죠.

 



가장 넓은 방을 쓰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부부가 쓰지 않는 나머지 공간에는, 정말 아무도 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비운 그 자리에는 짐들 즉, '살림살이'가 삽니다.





언젠가 쓸 것 같아 못 버린 물건들, 자녀들이 두고 간 짐, 명절 선물 상자, 몇 년째 손도 안 댄 옷들. 이것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베란다를 차지하고, 장롱 위를 차지합니다환기가 안 되는 그 방엔 결로가 끼고 곰팡이가 피면서 점점 창고가 되어가죠


한번 둘러보세요.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쓰는 입주자는, 내가 아니라 짐일지도 모릅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씀이지만, 평생 모은 돈으로 장만한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짐에게 내주고, 월세 한 푼 못 받고 있는 셈입니다. 심지어 그 짐을 위해 난방비와 관리비까지 대신 내주면서요.

 

그래서 저는 한 집에 사실 세 개의 평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등기부등본에 적힌 평수, 살림살이가 차지한 평수, 그리고 내가 진짜로 살아가는 평수. 


우리가 큰돈을 치르고 산 건 첫 번째 평수인데, 정작 내 삶이 담기는 건 세 번째 평수예요

이 세 숫자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우리는 쓰지도 않는 공간에 돈과 에너지를 붓고 있는 셈입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아이 셋을 키우던 시절엔 7인승 미니밴이 필요했죠그런데 자녀가 모두 독립해 부부 둘만 남았는데도 그 큰 차를 계속 몬다면 어떨까요? 주차는 힘들고, 기름값과 보험료, 세금은 전부 큰 차 기준으로 나가는데 뒷좌석은 늘 비어 있습니다


집도 똑같아요. 7인승 유지비를 내면서 운전석 하나만 쓰고 있는 것. 그게 지금 수많은 노년 가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집의 크기는 알아도, 쓰는 공간은 모른다

 

우리는 내 집의 크기를 정확히 압니다. 계약서에 적혀 있고, 아파트 이름 뒤에 숫자로 따라붙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실제로 쓰는 공간이 몇 평인가'는 한 번도 세어본 적이 없습니다.

 

흔히 34평을 '국민 평수'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 크기가 두 사람 살기에 딱 좋아서 국민 평수가 된 게 아닙니다. 대출이 잘 나오고, 팔기 쉽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크기이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거주 적합성의 단위가 아니라, 부동산 유동성의 단위입니다.

우리나라가 유독 심한 부분이에요. 집의 크기와 '비싸게 잘 팔리는가'를 한 묶음으로 보는 습관이죠.

 

그래서 저는 집을 두 종류로 나눠서 봅니다사고파는 자산으로서의 '사는(buy)집', 내가 매일 몸을 누이고 살아가는 '사는(live)집'젊을 때는 이 둘이 같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노후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다른 방송에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넓을수록 좋은 거지 무슨 소리냐", "어렵게 고생해서 모은 재산으로 큰 집에서 여유 있게 사는 게 뭐가 문제냐"라는 거였죠. 어떤 분은 댓글에 "너나 늙어서 원룸에서 살아라"라고까지 쓰셨더군요


솔직히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평생 더 넓은 집을 목표로 달려온 세대에게 평수는 단순한 면적이 아니라 노력의 증표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만 짚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는 재산이 아주 많아 넓은 집에 도우미를 두고 사시는 분들을 향한 게 아니에요. 가장 보편적인, 부부 둘이서 혹은 혼자서 직접 집을 쓸고 닦으며 살아가는 분들 이야기입니다나이가 들수록 청소부터 관리까지 점점 버거워지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쓰지도 않는 방을 잔뜩 떠안고 거기에 매달 비용과 품을 들이기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크기의 집이 오히려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그렇게 아낀 돈과 에너지는 나의 건강과 취미, 사람들과의 관계에 쓰면 되고요.

 



'인생의 왕관'을 위한 집

 

영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스렛은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눴습니다.


의존하며 성장하는 제 1기,  일과 가족을 위해 사는 제 2기 그리고 직업적 의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온전히 나를 위해 사는 제 3기. 

라스렛은 이 제3기를 "인생의 왕관 (The Crown of Life)"이라고 불렀어요. 체력은 아직 남아 있고, 경험은 쌓였고, 누군가를 책임질 의무는 줄어든 시기.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때입니다마지막 제 4기는 돌봄이 필요해지는 시기가만히 생각해 보면 1기와 4기는 공통점이 많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여기에 한국 사람들의 큰 오해가 있습니다.


'노후의 집'을 떠올릴 때 대부분 4, 그러니까 쇠약해진 몸을 돌보는 공간만 상상하세요. 안전 손잡이, 병원 근처, 관리 편한 평수. 물론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20, 30년이 남는 시대예요. 그 긴 제 3기를 살아갈 집은 '쉬는 공간'이 아니라 '활동의 거점'이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긴 제3기를 맞은 세대가, 그 시간을 보낼 공간을 제4기 기준으로만 고르고 있는 셈입니다.

 


 

 


200조 부자가 4천만 원짜리 집에 사는 이유

 

여기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워렌 버핏.

순 자산이 수백조 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부자죠. 이분이 사는 집이 어떤 집인지 아십니까? 1958년에, 우리 돈으로 약 4천만 원에 산 평범한 2층 주택입니다. 6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어요. 한 기자가 물었답니다. "왜 더 큰 집으로 이사 안 가십니까?" 버핏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지금 집에서 행복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면, 진작 옮겼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절약 정신이 아닙니다. 집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에요넓은 집이 곧 좋은 집이라는 믿음, 한 번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오히려 노후의 넓은 집은 외로움을 키우기도 합니다. 쓰지 않는 방이 늘어날수록 집은 관리해야 할 짐이 되고, 사람이 공간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빼앗기거든요.


공간이 사람을 품어야 하는데, 사람이 공간에 매이는 겁니다. 




평수를 줄이라는 게 아니라, 보는 눈을 바꾸자는 것

 

 


오해는 마세요. 무조건 평수를 줄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업실이 필요한 분도, 손주들이 자주 오는 분도 계시니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집을 보는 ''을 바꾸자는 겁니다.

 

출퇴근 거리, 아이들 학군 같은 외부 조건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내 기준으로 집을 고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평수가 곧 성공이라는 오래된 잣대로 그 자유를 다시 가두지 마시라는 거예요남에게 보이기 위한 평수가 아니라, 나의 제 3기를 충만하게 살아낼 공간. 거기서 줄인 에너지와 비용은 나의 취미와 관계, 새로운 활동에 쓰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내 기준'의 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골라야 할까요? 위치는 어디여야 하고, 층수는 몇 층이 좋으며, 동네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다음 편에서 본격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중장년만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유용정보, 영상 콘텐츠 [나이,kic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