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년 원전맨,
장난감 고치는 ‘토이 크리에이터’로 돌아오다
한 60대 정년퇴직자의 인생 2막, '장난감 닥터' 도전기
1979년, 스물다섯의 한 청년은 전기공학 책을 끼고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했다. 첫 근무지는 경상남도 고리원자력발전소. 그날 이후 41년 동안 그는 대한민국의 전기를 책임지는 ‘에너지의 심장’ 속에서 살았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터빈과 함께, 그의 인생도 쉼 없이 흘러갔다.
2020년 6월,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정년퇴직을 맞던 날, 그는 낯선 공허함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생애 가장 '재미있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토이 크리에이터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종관(66세) 씨의 이야기다.
그의 새로운 직함은 '토이 크리에이터(Toy Creator)'.
40여 년간 묵직한 산업 설비를 다루던 그의 손이 이제는 아이들의 작은 장난감을 매만진다.
■ 국가의 전기를 지키던 사나이, 공허함과 마주하다
그에게 첫 번째 인생은 ‘사명’이었다.
“국민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전기를 만드는 일, 그게 제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라며 깊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헌신의 이면에는 오해도 있었다. “원자력발전소를 ‘핵폭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실은 깨끗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41년 에너지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 평생의 현장을 떠난 날, 그는 갑자기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게다가 퇴직 시점이 하필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렸다.
"솔직히 해방감보다는 공허함이 많이 몰려왔지요.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것이 생활이었는데, '집콕'이 일상이 되니 만남이 거의 없어졌으니까요.“
그는 그 공허함을 공부와 독서로 메우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
그때 운명처럼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 "장난감 닥터?" 우연히 시작된 두 번째 삶
“서울시니어일자리지원센터에서 ‘장난감 닥터’를 모집한다는 문자를 받았어요. 손주의 장난감을 종종 고쳐줬던 터라, 바로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토이 크리에이터’의 길.
직무교육을 받고 인턴십을 위해 찾아간 안양의 ‘그린무브 공작소’는 말 그대로 장난감의 천국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그제야 알았죠. 이게 그냥 수리가 아니라, 버려진 장난감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구나.”

그의 하루는 세 단계로 이뤄진다.
먼저 선별 작업 — 기부나 수리가 가능한 장난감을 골라낸다.
그다음 분해 과정 — 수리가 불가능한 장난감은 철, 건전지 단자, 기판, 플라스틱 등 소재별로 완벽하게 분해 후 재활용한다.
마지막은 소독과 정리 — 선별된 장난감은 깨끗하게 소독한 뒤 국내외 어린이들에게 기부된다.
인턴십이 끝난 후 며칠 뒤, 그는 ‘그린무브 공작소’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오케이, 땡큐!”
"장벽은 없습니다. 내가 즐거우니까요.“
현재 그는 매일 오후 1시부터 4시 반까지 ‘토이 크리에이터’로 출근한다. 전문 용어나 낯선 공구도 이제는 친구 같다.
"이 나이에 '신입'이라기보다, 낯선 일이지만 그동안 살아오며 보던 일들입니다. 어떤 일이든 주어지면 공부하고 배워서 나갈 겁니다. 장벽은 없어요. 단지 몸이 건강해야겠지요.“
그의 일상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독서로 마음을 단단히 다진다.
수입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말에 그는 "돈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수입으로 만족합니다"라고 단언했다.
친구들도 그를 응원한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됐냐며 부러워하고, 다들 ‘파이팅!’을 외쳐줘요.”
무엇보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다.
“예전에도 일을 마치면 뒷정리를 깨끗하게 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장난감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거라 더욱 깨끗해야 하죠.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게 제 습관이자 자부심이에요.”

■ “인생의 기준은 결국 ‘나’입니다.”
퇴직 후 방황하는 동년배에게 그는 담담히 조언한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기준은 결국 '나'입니다. 내가 즐거워야 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과거에는 '부장님', '임원'으로 불렸을 그에게 10년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직함이나 성과가 아니었다.
"자주 만나고 싶은 친구, 동생, 형, 누님 같은 사람“
41년간 쉼 없이 달려온 '에너지 전문가'의 묵직한 자부심은, 이제 아이들의 웃음을 되찾아주고 환경을 살리는 '토이 크리에이터'의 따뜻한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인생 2막은 여전히 ‘전기’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글 · 사진 유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