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지하철 종로 3가역에서 8번이나 11번 출구로 나오면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만난다. 56천여 평(186,786 )의 거대한 도심 속 숲에 싸인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이다.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곳이다. 그러나 종묘도 코로나19의 먹구름을 피하지 못했다. 조선 왕들에 대한 제향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묘대제는 해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과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 봉행된다. 5월은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 행사로 치러지고, 11월은 전통이 숨 쉬는 순수한 제향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올해는 53일 예정된 봄 제향이 취소돼 117일의 가을 제향으로 일원화 된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고육지책이다.

 

정전과 영녕전으로 구성된 종묘에는 모두 83신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을 통치한 25군주와 38왕후, 사후 추존된 9임금과 9추존 왕후, 1명의 황태자와 1명의 황태자비 신위다. 조선을 다스린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로 인해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따라서 종묘대제에서 제향 받는 대상은 35(황태자 1명 포함) 임금과 48왕후(황태자비 1명 포함).

 

종묘 제향을 모실 제관들인 각 위치에 나아가는 취위에 앞서 대기하고 있다.<출처:이상주>

 

그런데 실제로는 조선의 임금과 왕후 외에 고려의 군주인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제향을 받는다. 결국 종묘대제는 조선의 제왕 부부 83신위와 고려 왕 부부 2신위의 제향이라고 할 수 있다.

 

종묘의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에 있다. 정식 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신당 안의 감실 중앙 벽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影幀)이 있고, 옆면의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됐다.

 

제관들이 제향을 모시기 위해 신실의 각 위치 자리하고 있다. <출처: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영정의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규를 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 왕비는 화관을 썼다. 준마도는 3폭인데 영정이 있는 곳으로부터 첫 번째에는 구름 속에 마구를 갖춘 준마 옆에 홍·청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의 고삐를 바짝 잡고 북쪽을 향하고 있다. 다음 그림은 마구를 갖춘 준마가 구름 속을 달리는 것이고, 마지막 그림은 첫 그림과 비슷한데 청색 옷을 입은 사람이 준마와 함께 남향을 하고 있다.

 

공민왕 신당. 정면의 감실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가 있다. <출처:이상주>

 

이같이 조선 왕실 사당 속의 섬이 된 고려 왕의 신당에서 공민왕 부부의 제향이 모셔진다. 그러나 공민왕 부부는 종묘의 주빈(主賓)이 아니기에 제향이 간략하게 진행된다. 헌관은 개성 왕씨 문중에서 맡고, 집사는 종묘대제 제관이 봉무한다. 술은 초헌이 한 번만 올리고, 절은 사배를 한다. 또 축문은 읽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의 왕 제향에서는 초헌 아헌 종헌이 술을 세 차례 올리고, 축문을 낭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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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부부의 제향은 종묘대제 하루 전에 모신다. 이날 전향례를 행한 종묘대제 제관들이 왕주와 제물을 준비해 예를 갖춘다. 제향을 모시는 제관은 종묘 제1실의 대축과 좌전 그리고 임금을 안내하는 알자다. 종묘 제1실에는 조선의 건국주 태조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종묘대제 하루 전날에 종묘의 재궁에는 향안청이 마련된다. 이곳은 임금이 궁궐에서 보낸 향과 축을 보관하는 신성한 임시 장소다. 현대에는 향과 축을 조선 왕국의 법통을 이은 대한제국 황사손이 총재로 있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보낸다. 신성한 축과 향을 안치하는 의식이 전향례다. 경건한 전향례를 마친 제관들이 공민왕 신당에서 개성 왕씨 문중 대표가 공민왕에게 술을 올릴 때 함께 예를 갖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민왕 신당은 누가 왜 언제 세웠을까. 신당의 건립 연대와 이유는 미상이다. 영정도 조선 초기로 추정될 뿐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공식 기록이 없다. 종묘의궤, 종묘의궤속록, 춘관통고, 국조오례의서례 등의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종묘 건립 때 짓고 예를 갖췄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원본이 사라진 종묘지의 필사본에는 '종묘를 지을 때 북쪽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공민왕의 영정이 묘정에 떨어졌다. 조정에서 의논 끝에 그 영정이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공민왕 부부에게 헌관(가운데)이 잔을 올리고 있다. 헌관은 개성 왕씨 문중에서 담당하고, 집사는 종묘 제1실의 대축과 좌전이 맡는다.<출처:문화재청>

 

미스터리인 공민왕 신당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고려 왕족 달래기,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풀이할 수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계승을 말했고, 공민왕의 후비인 정비 안씨의 교지를 받들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는 1392년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정권승계를 주장했다. 여기에는 고려 왕족 달래기도 언급되어 있다.

 

조선이 종묘에 공민왕 신당을 세운 속내를 지금에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왕실의 신전인 종묘에서 600여 년 동안 고려의 임금이 모셔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계승과 화합이고, 고려의 시각에서는 용서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