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레트로 열풍이다. 양은 도시락을 흔들어 먹던 검정 교복 차림의 까까머리 고교생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추억의 수학여행’ 상품이 중년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었는가.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옆구리에 책가방을 낀 남학생들과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수학여행 단골 코스로 모여든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들 대부분이 머리에 희끗희끗한 시간이 더해진 중장년층이다.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마케팅이겠지만, 열정 넘쳤던 청춘의 시간을 재현 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 (사진 출처 : 예스24)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 주인공들은 ‘58년 개띠’ 베이비붐 세대의 대표 선수들이다. 네 명의 인물들을 통해 다소 우스꽝스럽고 어이없는 고만고만한 인생사를 보여주고 있다. ‘만수산 4인방’으로 불리는 (두환, 조국, 승주, 형준) 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자라고 놀던 친구들이다. 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살아간다. 소설은 담임과 물리선생에게 무지막지한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만 누군가는 숙제 베끼겠다니까 말린 게 누구야, 혹은 맨 처음에 배갈 시키자고 한 게 누구야, 하고 옆자리 짝을 비난했다. 또 누군가는 그날 오랜만에 학교를 나갔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의형제의 운명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어 우리를 압박했다. 다음날부터 당장 반 아이들은 우리를 ‘만수산 4인방’이라는 호칭으로 묶어 불렀다. 물리 선생의 가공할 티자와 페타이어로 만든 검은 슬리퍼의 협공 아래, 한데 엮여서 고통스럽게 몸을 비트는 우리의 모습이 드렁칡 같았다는 것이다.

P. 16

 

소설에는 눈에 띄는 사건도 매력적인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험한 세상 속에서 구르고 굴러다니다가 생긴 것도 두루뭉술하고 빛이 바래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인물뿐이다. 교내 써클인 국제펜팔부에 4인방들은 무더기로 가입을 한다. J여고 2학년 펜팔부 양소희. 여학교 펜팔부와 야유회를 추진한 일로 교무실로 불러 가서 혼쭐이 나면서도 예쁜 소희를 둘러싸고 서로서로 눈치작전이 뜨겁다. 잘 생긴 외모로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승주, 주먹세계를 대표할 만한 캐릭터의 두환, 무조건 나서고 보는 조국, 소설 속 화자인 형준, 서로 각별한 사이도 아닐뿐더러 깊은 갈등의 관계도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냥 살아가면서 얽히는 관계이다. 전혀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은 나머지 셋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의 사람이라고 자위하는데 희한하게도 적당히 서로에게 얽혀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 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P.53

 

1976년 종로 2가와 낙원상가의 모습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나 균질적으로 흐른다.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덧없음 속에서 4인방들은 좀 더 특별한 일을 기다리는 동시에, 현재 삶에서는 적당히 재어가면서 살아간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70년대 8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이른다. 유신시대를 학창시절로 보내고 독재정권과 데모로 얼룩진 20대를 보내지만 소설에서는 그 시대를 힘주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보다는 한발 뒤에 빠져 있는 마이너들의 삶을 낱낱이 비춘다. ‘만수산 4인방’은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번도 주인공으로 서지 못하고,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남들 다 가는 군대도 다녀왔고, 남들 다 하는 결혼도 한다.

 

1987년 우리들은 서른 살이 되었다.(중략) 그런데도 서른살이 될 때까지 두환은 우리의 머릿속에 인생의 과정을 차례차례 함께 겪은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모두의 인생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른살 이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중략) 5월은 한 달 내내 거리가 시끄러웠다. 6월로 접어들자 절정을 이루었다. 사무실이나 식당, 술집 어디를 가든 월급쟁이들의 화제는 비슷했다. 내가 근무하는 광고 회사가 시내 한복판인 태평로에 있었으므로 나는 시위대와 자주 마주쳤다. 물론 일부러 접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중략) 안 그래도 심사가 좋지 않은 두환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저건 또 뭐하는 부대냐, 하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리자 내가 넥타이부대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네 사람도 옷차림에서만은 넥타이부대의 정규군 차림이었다.

P.124~153

 

소설은 어디에도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군데군데 우리사회에 작가가 던지는 의미 있는 풍자에 헛헛한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만수산 4인방들의 인생행로도 우리 사회의 문제적 공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나 혹은 너의 이야기, 그저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옆집의 이야기, 동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낙원 떡집 (사진 출처 : 서울시 공식 관광정보 웹사이트)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에 나오는 조국의 회사는 낙원상가 뒤 운현궁 방향으로 자리 잡은 낙원 떡집 2층에 있다. 떡집으로 대표되던 낙원동의 전문 음식점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던 70년대에는 상당히 활력을 보이던 도시공간이었으나 쇠퇴의 길에 이른다. 근래 낙원동은 아구찜과 해물찜 거리로 바뀌었고 몇 군데 떡집만이 옛 기억을 불러올 뿐이다.

조국은 갈수록 허풍만 늘고, 결국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무너지는 실속 없는 인물이다. 그들은 조국의 사무실에 모여 딱 한 번, 일을 벌인다. 조국이 소개한 브라질 관광은 사업가 뻬뜨루 최와 함께 크게 사업을 일으켜 가족에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에 젖게 한다. 그러나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짓말이다. ‘잘 살아보겠다는데 되는 일이 없다’며 이들은 세상의 불공평을 한탄한다.

 

조국의 회사는 찾기 어렵기도 하고 임대료를 많이 받기도 어려울듯한 외진 골목 안에 있었다. 낙원떡집이라고 간판이 보일 거야, 그 건물 2층으로 와, 하던 설명대로 떡집 간판이 아니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였다. 떡집 옆으로는 ‘평화세탁소’라는 간판이 조그맣게 보였다. 내가 건물 측면에 있는 계단 쪽으로 돌아가자 떡집에서는 떡집 여자가, 세탁소에서는 세탁소 남자가 동시에 나란히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보나마나 부부일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염탐하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손님이 장물아비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전당포 주인을 연상시켰다. 조국의 회사에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P.175

 

낙원동 골목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다만, 친구들을 모두 버리고 소희와 도망쳤던 두환. 그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본인도 2000년 겨울 먼 타국의 슈퍼마켓 계산대 옆에서 피를 흘리며 저 세상으로 가버린 두환의 무덤 앞에 나머지 셋이 모여 종이컵에 소주를 홀짝인다. ‘조국프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떡집 2층에서 피자집 3층에 사무실을 얻은 조국, 승주는 그동안 직장을 세 군데나 옮기며 근근이 용돈벌이에 허송세월을 보내며 내심 자기들이 꽤 괜찮게 살고 있다고 ‘개폼’을 잡는다. 그래서 너는 사는 게 재밌냐? 이 나이에 재미는 무슨 재미야.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는 동안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가늘고 길게 살고자 했던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만수산 4인방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동시대를 함께 건넜던 그들에게 나는 묘한 연대감을 느낀다. 첫사랑, 귀에 익은 팝송, 낡고 오래된 것들이 전해주는 느린 감성은, 과거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를 낙원동 후미진 골목길로 불러 모은다.